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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코드’의 유행과 청소년 동성애자의 권리

작성일 : 06-07-04 16:19             
‘동성애 코드’의 유행과 청소년 동성애자의 권리
글쓴이 : 아하지기 (211.244.57.85)  조회 : 588  
 
 

얼마 전 ‘왕의 남자’가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한국 영화 역사상 최고 흥행기록을 갱신했다. 한국 국민의 네 명 중 한 명이 ‘왕의 남자’를 본 셈이라니, 얼마나 엄청난 사람의 수가 영화를 관람했는지 짐작이 간다. 이렇게 왕의 남자가 흥행을 한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원인 설이 있었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조선시대 비운의 왕인 ‘연산군’의 이야기를 내세웠다는 점, 그리고 그 왕을 둘러싼 광대들의 놀이판이라는 소재가 그간 다루어지지 않았던 신선한 소재라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극의 소재들이 연령대와 상관없이 관객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었기에, 그러한 흥행의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왕의 남자’의 왕의 남자인 ‘공길’역의 배우도 젊은 여성 관객들의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면서 흥행에 한 몫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왕의 남자’가 한국최고 흥행기록을 세울 만큼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개봉되기 전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왕의 남자’에 한국영화계의 A급 배우들이 출연하지 않았다는 점, 즉 블록버스터 급의 영화들에 비해 턱없이 낮은 예산으로 제작되었다는 점, 한국영화에서 그간 금기시되어 오던 사극 장르의 영화였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왕의 남자’ 전면에 걸친 이야기 구성의 중심에 동성애가 소재로 다루어졌다는 점이다. 극 중 광대인 ‘공길’과 ‘장생’, 그리고 왕인 ‘연산군’을 둘러싼 삼각구도의 애정관계는 한국 국민의 정서상 거부감을 가져올 것이라 예상되었다. 따라서 영화 관계자들은 ‘왕의 남자’가 참신하기는 하지만, 그다지 큰 흥행은 가져오지 못할 것이라 예측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예상을 깨고 ‘왕의 남자’는 흥행할 수 있었던 것일까? 영화관계자들의 예측과 달리, 실제 한국사회의 사람들은 이미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지고 없었던 것일까? 실제로 ‘왕의 남자’의 흥행 이후, 언론에서는 앞 다투어 ‘동성애 코드의 유행’을 예고했다. 그리고 ‘왕의 남자’가 흥행한 비슷한 시기에, 두 남성의 애틋한 사랑을 다룬 미국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이 상영되었다. 뿐만 아니라, 나이 든 동성애자 남성들의 공동체를 소재로 한 일본 영화인 ‘메종 드 히미꼬’, 시한부 인생을 사는 동성애자 남성을 주인공으로 한 프랑스 영화인 ‘타임 투 리브’가 연이어 개봉하였다. 이 영화들은 모두 어느 정도의 흥행을 거두었고, 관객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동성애를 소재로 한 영화들의 개봉과 흥행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정말 이전까지와는 달리, 한국사회에서 동성애는 더 이상 혐오의 대상이 아님을 의미하는가? 

영화 흥행 후, ‘왕의 남자’가 동성애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흥행할 수 있었던 요인에 대해 몇 몇 영화 관계자들은 이렇게 분석했다. ‘왕의 남자’ 이야기 전반에서 동성애가 등장하긴 하지만, 한국인의 정서에 걸맞게 은근히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노골적인 동성 간의 애정표현이라든지 성행위에 대한 묘사가 없기 때문에, 한국 국민의 정서에 그다지 어긋남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거꾸로 해석하면, 노골적인 동성 간의 애정표현이나 성행위에 대한 묘사는 국민 정서 상 불편함을 이끌어낸다는 말이 된다. 이 때 불편함을 이끌어내는 이유는 ‘노골적인 성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동성 간에 일어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만약 단순히 노골적인 성행위의 수위만이 문제가 된다면, 영화 심의 등급 기준에 맞춰 관객 연령에 제한을 두면 그 뿐이다. 이는 대부분의 영화에 적용되는 매우 합법적인 절차이므로, 관객들에게 어떤 불편함도 심어주지 않는다. 즉 단순히 노골적인 성행위의 묘사는 ‘국민 정서 상 불편함’을 이끌어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렇듯 영화에 드러난 동성 간의 성행위나 애정표현은 ‘국민 정서 상 불편함’을 이끌어내는 당연한 것으로 취급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취급이 정당한가 하는 것이다. 

몇 해 전인 2003년, ‘올드 보이’라는 영화가 세계적으로 명망 있는 칸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면서 한국 영화계에 신드롬을 일으켰다. 300만 명이 넘는 관객 수를 기록했으며, ‘한국 영화의 힘을 과시 했다’는 식의 언론의 찬사가 이어졌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올드 보이’가 ‘근친 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었음에도, 이에 대한 언론의 비판이나 우려의 목소리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올드보이’는 친 남매의 사랑, 아버지와 딸의 사랑 이야기가 주된 플롯을 형성하고 있다. 게다가 그 애정관계에 대한 묘사는 은근하지 않고, 매우 노골적이고 선정적인 관객의 시선을 염두에 둔 채 직접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한국사회는 분명 과거의 유교문화 전통과 ‘행복한’ 가족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적 가치관이 강하게 남아있는 사회이다. 따라서 ‘근친 간의 사랑’은 한국사회의 ‘국민 정서상 불편함’을 이끌어내는 소재임이 분명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드 보이’는 ‘국민 정서 상 불편함’을 이끌어내는 불쾌한 영화가 아니라, 칸 영화제에서 수상한 훌륭한 영화로 취급되었다. 이는 ‘국민 정서 상 불편함’이라는 기준이 고정된 확고한 형태이거나, 당위적으로 모든 상황에서 고려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이렇듯 ‘올드 보이’를 둘러싼 한국사회의 반응은 1997년 한국에서 상영금지조치된 ‘해피 투게더’라는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해피 투게더’는 당시 동성 간의 성행위를 노골적으로 묘사 한다는 이유로 국내에서 상영금지조치 당했다. 그런데 이 영화, ‘해피 투게더’ 또한 ‘올드보이’와 같은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을 만큼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작품성보다 국민 정서상의 불편함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상영 금지되었던 것이다. 물론, ‘올드 보이’와 '해피 투게더‘가 상영된 시기가 달랐고, 특히 영화에 대한 사전검열제 폐지 전, 후의 시기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동성 간의 노골적인 애정표현이나 성행위‘에 대한 혐오는 동성애 자체에 대한 혐오라는 것이고, 그것이 국민 정서상 불편함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정당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거칠게 말하면, 영화 속에서 이성애자 남, 녀가 옷을 다 벗고 십여 분을 뒹구는 장면은 국민 정서에 합당하지만, 남-남 등장인물이나 여-여 등장인물이 서로 키스만 해도 그것은 국민 정서에 반하는 장면이 된다. 

이렇듯 동성애를 소재로 한 영화가 연이어 개봉하고 있고, 또 TV 광고 등에서는 동성애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는 분명 한국사회에서 일어난 최근의 변화이다. 이러한 변화가 분명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라 해도, 적어도 예전처럼 동성애를 음지의 문화로만 취급하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즉 적어도 동성애가 미디어 등의 공적인 장에서 다루어져서는 안 될 ‘부적절한’ 소재인 양 취급되지는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전까지는 미디어에서 동성애를 어떻게 다루어 왔는가? 

2004년 청소년 보호법 시행령 상의 청소년 유해물 판단기준 조항에 포함되어 있던 동성애 조항이 삭제되었다. 이는 <한국여성성적소수자인권운동모임 끼리끼리>(현, 한국레즈비언상담소)가 PC방 등 공공 시설의 컴퓨터에 설치되어 있는 청소년 유해 프로그램 차단 소프트웨어가 ‘동성애’와 관련된 모든 웹페이지를 차단하고 있는 것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한 인권침해로 제소한 것에 대한 성과이다. 즉 이전까지는 한국사회의 모든 청소년들은 인터넷 상의 모든 동성애 관련 웹페이지, 심지어 인권단체인 끼리끼리의 홈페이지조차도 접근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2001년에 한국 최초의 동성애자 웹사이트인 ‘엑스존(http://exzone.com)’은 정보통신윤리위원회와 청소년보호위원회로부터 청소년 유해사이트라는 판결을 받고, 폐쇄 조치되었다. 엑스존은 이 판결에 대해 행정처분 무효 소송을 걸었으나, 2심에 걸쳐 패소하였다. 법원 판결문에는 판단력이 부족한 청소년들에게 균형 있는 정보를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동성애를 상대적으로 우월하거나 바람직한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 우려가 있는 매체물을 단속하기 위해 청소년 유해 사이트의 차단은 필요하다고 되어 있었다. 지금은 삭제가 되었으나, 당시 문제가 된 조항은 청소년 보호법 시행령 제7조 다항이다. 내용은 “수간을 묘사하거나 혼음, 근친상간, 동성애, 가학/피학성 음란성 등 변태 성행위, 매춘행위 기차 사회 통념상 허용되지 아니한 성관계를 조장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동성애는 ‘수간’이나 ‘변태 성행위’와 같이 단순히 성관계의 한 유형으로만 볼 수 없다. 동성애에 관해 사람들이 흔히 가지는 편견은 동성애가 동성 간 맺는 성관계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동성애자 인권단체들은 ‘동성애’와 ‘동성연애’를 혼동하여 사용하지 말 것을 주장한다. 그 이유는 ‘동성연애’가 동성 간의 사랑을 단순히 ‘연애’로 소급하여 설명함으로써, 동성애라는 인간의 본질을 뒤흔드는 정체성의 문제가 아닌 가볍고 순간적인 행위로 이해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성애를 이성애와 동등한 정체성의 문제로 인식할 것을 주장한다. 이것은 동성애의 고정된 본질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한국사회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회에서 이성애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되는 반면, 동성애는 한 때의 감정이나 지나가는 과정으로 취급되는 것에 대한 반대급부로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단순한 반대급부의 의미만이 아니라, 실제로 동성애자들 대부분은 ‘연애의 종류’나 가벼운 ‘취향’의 문제가 아닌, 인간의 삶에 무게를 둔 정체성의 문제로 자신의 동성애 정체성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만약 동성애자들 스스로도 가벼운 취향 정도로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있었고 실제로 그러하다면, 이렇게 이성애자가 되기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동성애자는 남아 있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 이렇듯 동성애에 대한 잘못된 편견은 특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는 시기의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 한국사회는 철저하게 이성애자 중심의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이성애자로 간주되고, 이성애자로 살기를 강요당하고, 이성애자가 되어야만 하는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렇게 사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고, 크고 작은 불만이 있어도 그렇게 적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고 인식조차 하기 어렵거나(무의식적 부정), 인식하기 시작한다 할지라도 필사적인 노력을 다해 그것을 부정한다 (의식적 부정). 또한 이러한 이중의 부정이라는 산을 넘어, 동성애자로서의 삶을 선택했다 할지라도 온갖 험난한 사회의 시선과 고통으로 인해 삶 자체를 포기하기도 한다. 

청소년의 경우는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처음 인식하기 시작할 무렵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결정을 내린 후의 (상대적으로) 안정된 상태가 아니라, 온갖 복잡한 생각을 몽땅 끄집어내어 혼란스러운 상태, 폭풍우의 한 복판에서 바람을 몸 전체로 맞고 있는 그런 상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은, 청소년 당사자 스스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최대한 정확하고 올바른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는 환경을 보장받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청소년들이 처해있는 상황은 어떠한가? 필자가 직접 청소년들을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물었을 때, 단 한명도 학교 등의 공적인 교육 시설을 통해 동성애나 양성애에 관한 교육, 정보를 제공받은 적이 없다고 답했다. 이는 분명 사실일 것이다. 인권단체에 속해있는 교사들이나, 인권교육을 담당하는 단체들조차도 동성애를 소재로 하여 청소년들에게 직접 강의한 적이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하긴, 청소년보호법 시행령 상의 청소년 유해물 금지 조항에서 동성애가 삭제된 지 고작 2년이 지났을 뿐이니, 이는 너무 당연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이러한 현실들이 변화될 여지가 있는가? (현실은 가만히 두었을 때도 분명 변하긴 하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먼저 자신이 가진 편견의 틀을 깨는 작업들이 필요하다.) 흔히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동성애와 관련된 올바른 인권교육을 실시할 것을 요청하면 이런 반응이 흔히 온다. 자신은 동성애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굳이 판단력이 흐린 청소년들에게 동성애를 권장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교사 자신이 동성애에 대한 사회의 편견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과 같다. 동성애에 대해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것과 동성애를 권장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사회적으로 동성애는 나쁜 것이었고, 따라서 드러나서는 안 될 것으로 취급받아 왔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들 동성애에 대해 입을 다무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분명 ‘올바른’ 상황은 아니었다. ‘올바른’ 상황에서라면 누구든 동성애든 이성애든 자연스럽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하고, 얘기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학교 교과서에도 “Hi, Jane!", "Hi, Tom!" 대신 ”Hi, Tom!", "Hi, Mark!“가 ”안녕, 철수야!“, ”안녕, 영희야!“ 대신 ”안녕, 순이야!“, ”안녕, 영희야“가 등장해야 한다. 늘 모든 가족이 엄마, 아빠, 오빠와 내가 아닌 엄마와 또 다른 엄마, 아빠와 또 다른 아빠의 모습으로도 묘사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런데, 실제 현실은 어떠한가? 모든 교과서와 학교 생활, 청소년을 둘러싼 환경 대부분은 이성애만을 이야기하고, 그에 따른 정보만을 제공한다. 이는 분명 이성애를 ‘권장’하는 것을 넘어서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교사들이 이성애를 강요하는 현실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면서, 굳이 동성애에 대한 아주 소소한 교육조차도 부담스러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 교사 스스로 ‘이성애가 자연스럽고 권장되어야 할 것’이라는 사회적 편견을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에, 동성애를 여전히 ‘부자연스럽고 지양되어야 할 것’으로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편견은 스스로 아무리 ”동성애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변명을 해도, 동성애를 나쁜 것으로 취급하는 것과 같다. 그럴 리 없겠지만, ”자신은 동성애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굳이 판단력이 흐린 청소년들에게 동성애를 권장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분들께 이렇게 조언하고 싶다. 

“청소년들에게 설사 동성애를 권장하게 되더라도, 그것은 전혀 나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엄청난 무게로 이성애자가 되기를 강요해왔음에도, 여전히 동성애자는 살아남아왔습니다. 그러니 까짓 거 동성애자 되라고 조금 권장하더라도 이성애자들이 쉽사리 사라지겠습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이렇게 불공평하게 이성애자와 동성애자가 지내왔으니, 조금쯤은 동성애자들의 삶을 권장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공평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이다. 

이렇듯 청소년들은 정체성과 관련된 올바른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과 더불어, 학교라는 폐쇄된 공간 안에서 원하지 않는 혐오와 폭력의 희생양이 되고 있는 현실도 함께 겪고 있다. 

얼마 전, 여성 영화제에서 ‘이반 검열’이라는 단편 다큐멘터리가 상영되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학교에서 ‘이반’이라는 이유로 교사와 친구들에게 따돌림과 부당한 대우를 당하는 10대 여중생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찍은 것이다. 관객은 그 여중생과 같은 시선으로 영상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 내내 슬프고 가슴 아픈 현실이 전해져온다. ‘이반 검열’의 내용들은 실제 학교라는 공간에서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편견에 가득 찬 폭력들이 생산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반 검열’의 주인공은 담임교사에게 ‘이반’임이 들통 나자 학교에서의 모든 자유로운 활동을 금지 당한다. 심지어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금지되고, 점심시간에도 혼자 점심을 먹어야 하고 등, 하교 길도 혼자 걸어가야 한다. 잠깐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이 또 발각되자 체벌을 당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담임교사는 친구들에게 모두 주인공인 ‘이반’ 아이와 어울리지 말라고 엄포를 놓기도 한다. 

이러한 현실은 비단 ‘이반검열’의 주인공만 겪고 있는 아주 특수한 상황은 아닐 것이다. 한국레즈비언상담소는 학교에서 실제로 행해지는 ‘이반’ 학생들에 대한 폭력에 대해 실제로 조사한 바 있다. 자신이 밝혀지게 되면 또 다시 학교생활이 어려워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생각보다 적은 청소년들이 조사에 참여했다. 그러나 당시 조사를 통해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학교에서의 동성애자 청소년들에게 가하는 폭력 상황이 어느 정도 드러나게 되었다. 그 중 충격적인 여러 사례들 중 하나는, 학교가 가정통신문을 통해 ‘이반을 검열하는 방법’을 학부모에게 공지하여 철저하게 단속하도록 한 예이다. ‘이반을 검열하는 방법’에는 한 때 여학생들 사이에 유행했던 머리 스타일인 ‘칼머리’를 했거나, 힙합바지를 즐겨 입고, 집에 늦게 귀가하거나, 여자 친구들끼리 너무 붙어 다니는 경우 등이 포함되어 있다. 또 다른 사례로는 학교에서 여자 친구들끼리 손을 잡거나 스킨 쉽을 하는 것을 금지한 경우였는데, 이를 어길 경우 벌점을 부과하여 불이익을 주는 것으로 처벌하였다. 물론 이러한 사례들 외에도 ‘이반’임이 소문이 난 후, 교사와 친구들이 유, 무형의 폭력을 휘두르자 학교를 그만두거나 옮긴 사례들, 퇴학당한 사례들도 무수히 많았다. 

이러한 사례들은 한국사회의 청소년 동성애자들이 어떤 위치에 처해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폐쇄된 공간이라는 학교의 특성상, 어쩌면 학교는 잘못된 사회적 편견이 한층 강화된 채 재생산되고 있는 곳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학교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상대적으로 더 드러나기 어렵다는 점에서 문제는 심각해진다. 학생이라는 신분에서 청소년들은 학교를 벗어나기 더욱 어렵고, 싫더라도 그 공간과 집단에 속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사회에서 청소년들의 자살 원인 중 매우 높은 비율이 동성애 정체성에 대한 고민 때문이며, 이는 한국사회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단지, 한국사회에서는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동성애 코드’가 유행하면서 온갖 매체와 영화 등에서 동성애 관련 상품이 등장하고 있다. 혹자는 이러한 현실을 ‘포스트 모던 퀴어정체성’의 시기라고 말하기도 하고, 동성애자의 권리가 한층 높아졌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왕의 남자’에서 전 국민이 보인 열렬한 반응의 현실과 ‘이반검열’의 주인공이 살고 있는 현실은 마치 완전히 다른 세상처럼 보인다. 분명 우리가 살고 있는 같은 현실의 한 부분들일 텐데 도무지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질문과 대답이 서로 엉뚱한 매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 동성애자들의 삶, 혹은 청소년 동성애자들의 삶이 예전보다 더 나아졌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한국사회 동성애자들 개개인의 삶, 청소년 동성애자들 개개인의 삶을 들여다봐야 한다. 물론 한 두 명의 개인들 사례만으로는 모두 파악할 수 없으니, 최대한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두어 살펴야 한다. 만약 직접 듣고 볼 수 없다면, 그에 애정을 쏟고 관심을 갖는 단체들의 목소리를 살펴야 한다. 그런데 위의 질문의 답을 엉뚱하게도 영화 평론가들이나 영화 관객들에게 묻고 있는 셈이니, 완전히 엉뚱한 답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 스스로 동성애에 관심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동성애자들이 겪는 억압이나 차별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동성애를 다룬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닌 현실을 살아가는 동성애자들의 삶과 그 현실에서 열심히 발로 뛰는 동성애자 인권 단체들에게 조금의 관심이라도 기울이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적어도 진실과 환타지는 구별하게 될 테니 말이다. 


레즈비언 권리연구소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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