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다른, 소년의 밤과 소녀의 밤

작성일 : 06-06-01 09:49             
너무나 다른, 소년의 밤과 소녀의 밤
글쓴이 : 아하지기 (220.86.24.221)  조회 : 696  
 
 

자정이 가까운 늦은 밤 퇴근길, 동네 공원을 지나치다 탁탁 튀어오르는 공 소리에 눈길이 쏠렸다. 열대여섯살쯤 보이는 소년 하나가 아무도 없는 공원의 농구대를 맴돌며 열심히 공놀이를 하고 있다. 저렇게 한참을 공과 같이 놀다가 지칠 때면, 그는 누구라도 앉아 쉴 수 있는 벤치에 앉아 숨고르기를 할 것이다. 블록 깔린 바닥에 눕는다한들 어떠리? 그러고는 어두컴컴한 하늘에서 빛나고 있는 별을 쳐다보기도 하겠지. 그날따라 밤바람은 왜 그렇게 시원했는지, 격한 운동 후의 땀을 식히기엔 2%도 부족하지 않았더랬다. 

늦은 밤 혼자 운동하는 소년이 만들어내는 낭만적인 풍경에 흐뭇해하는 것도 잠시. 그 주인공이 소녀라면? 늦은 밤을 만끽하는 청춘의 스토리는 공포와 불안으로 돌변한다. 늦은 시간에 여자 혼자서, 그것도 어리디 어린 여학생이 겁도 없이, 저러다 무슨 일 당하면 어쩌려고, 싸돌아다니는 것 보니 가출한 여자애인가? 의심과 걱정과 불안과 혐의에 가득 찬 시선이 꽂힐 것이고 그 소녀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공포 시나리오는 계속될 것이다. 당사자도 마찬가지다. 희미한 발자국 소리에도 심장은 두근반 서근반으로 뛸 테고, 사람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짧아지는 것을 불안하게 곁눈질할 테지. 땀에 절은 셔츠에 가슴이 드러나지 않을까 노심초사도 할 것이다. 이렇게 불안하니 뭐하러 그 밤에 땀 흘리겠는가? 

그렇다고 여럿이 떼지어 다니면 안전할까? 웬걸, 많은 사람이 오고가는 도심가에서 여학생들은 해질 무렵 “얼마면 되냐”는 원조교제 ‘제의’에 시달릴지도. 한 여자고등학교에서는 ‘원조교제’의 제의를 받아본 학생들이 80%에 육박하기도 했다 한다. ‘거절하면 그만’이라는 발상은 폭력을 방기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여성이라면 누구라도 “화끈하게 잘 해줄게, 얼마면 되냐?”는 질문을 그저 ‘제안’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를 노골적으로 성매매의 대상으로 만들고, 누구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몸으로 성적 대상화하는 것은 폭력이다. 그러한 폭력이 글로벌한 도시의 밤문화에서 늘상 이루어지는 일이라니, 기가 막힌 세상이다. 

요즈음 누군가 여성을 살해했다는 뉴스가 또 다시 늘어가는 것을 보고, 어떻게 해야 여자들이 안전한 밤을 찾을 수 있을지 친구들과 의논해보았다. 격투기를 배우고, 가스총을 사고, 되도록 안전한 길로 다니고, ‘얼마면 되냐’고 묻는 남자들을 성희롱으로 고소하는 운동을 벌이고…. 저마다 아이디어를 내느라 흥분했던 분위기는, 안전한 밤을 만드는 것이 결국은 여자 개인의 책임이 돼버린 사회에 대한 우울함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문득 늦은 밤 공원의 그 소년은 자기가 누리는 자유의 소중함을 알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오롯이 혼자라는 절대 고독의 쾌락과, 조그마한 자극에도 화들짝 놀라게 되는 준비된 공포감. 서글프게도 여자와 남자의 밤은 그렇게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한겨레 자유기고가
정박미경
chaos400@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