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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성(Sexuality)을 읽다./문화에서 성을 찾아내다

[영화] 현실과 진실을 넘나드는, '여배우들'

작성일 : 09-12-31 23:18             
[영화] 현실과 진실을 넘나드는, 여배우들
글쓴이 : 아하지기 (112.149.189.193)  조회 : 175  


원래 나는 영화를 보기 전까지 기대감과 긴장감을 최대로 유지하기 위해, 그 어떤 기사도, 어떤 줄거리도 읽지 않는다. 줄거리에 대한 주변의 소소한 입소문까지 피하면서 영화를 보는 당시의 상황을 최대한 즐기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 적어도 이 영화를 보기 전에는 미리 준비를 하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내용을 펼쳐 놓아도 속지 않으리라, 속으로 단단히 마음먹으며 온갖 기사들을 섭렵한 채로 영화를 감상하기로 했다.

할 말 많은 그녀들의 궁금한 영화 “여배우들”

톱 여배우 6명의 출연만으로도 화제가 되었는데, 개봉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간신히 볼 수 있었다. 예상한대로 영화 속 그녀들은 두말할 나위 없이 매혹적이었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영화는 기대했던 것에 비해 조금 심심했다. 새롭지만 신선하지 않았다고 할까. 이 시대에 유행하는 리얼리티 쇼에라도 나온 것처럼 시종일관 그녀들을 쫓아다니는 시선이 사실 나는 불편하기도 했다. TV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방식들이 영화에서까지 재현되니 전혀 새로울 일이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더 아쉬웠던 건 어차피 현실과 연기를 오갈 바에야 조금은 섹시한 얘기도 기대했고, 더 자극적인 얘기들도 기대했던 것 같다. 관음의 욕구들로 무장하고 간 나에게 영화는 그야말로 지극히 일상적이었고 뻔한 얘기들뿐이어서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우리는 이미 너무나 많은 촬영 현장을 모니터하고 있지 않았나? 전혀 대단해보이지 않는 컨셉에 단지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시기와 20대에서 60대의 대표 여배우들이 모여 화보 잡지를 촬영한다는 설정만이 그 특별함을 간신히 메워주었다. 그리고는, 홀로 받는 스포트라이트에 익숙한 그녀들의 기싸움으로 시작해 별로 보고 싶지 않았던 애틋한 눈물로 끝맺음되는 영화였다. 아, 이 화려한 여배우들을 두고 눈물이라니, 공연히 신파로 마무리 되는 영화에 화가 났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장르를 검색해보니, 저 멀리 미국 여배우들의 모습을 촬영한 ‘데브라 윙거를 찾아서’는 다큐멘터리라고 구분이 되어 있지만, 우리나라의 ‘여배우들’은 드라마로 분류되어 있었다. 아, 드라마라니. 팩션(faction)도 아니고 페이크 다큐도 아니고 드라마라니. 한국 특유의 정서 때문인 걸까.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될 개인사를 드러내서 영화까지 만든 마당에 눈물로 마무리하는 통속이라니. 좀 더 멋지게 마무리되길 바랐는데 말이다. 여배우들은 그저 속시원히 자기 얘기를 드러내려고 영화에 출연한 건 아니었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하여 누군가는 이 영화를 ‘토크멘터리’라고 부르며 여배우들의 인권신장 영화라고도 했다. 


드라마에 대한 의외의 발견

그러나 매우 실망한 이 영화에서 세상 속에 사는 여배우들을 보고, 나는 세상 속에 사는 나를 만나고 왔다. 

영화 속 시끌벅적한 촬영현장이라는 배경을 잊고 보니 나중엔 세대별로 눈에 띄는 그녀들의 특성에 더 관심이 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녀들처럼 살아 왔던, 혹은 살려고 했었던 내 모습들의 일면을 하나씩 발견했다. (pride, mystery, fame, jealousy, scandal, complex) 저렇게 성장하는구나, 저렇게 꼬이는구나, 저렇게 푸는구나, 하면서 여배우가 아닌 그저 영화 속에 나오는 여자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내 눈에 가장 띄었던 건 김옥빈이었다. 그녀의 유니크한 스타일도 맘에 들었지만 극중 김옥빈의 모습 곳곳에서 20대의 내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딱히 별 이유도 없는데 주변 사람들 눈치 보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챙겨주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에 어색해하는, 그러다 오히려 과장된 모습도 서슴치 않는. 끌렸다긴 보단 뜨끔했다. 그리고 재밌었다. 저런 청춘도 있구나. 갑작스레 내 모습을 직면하게 됐는데도 부끄럽지 않구나. 오, 그러고보니 이제 나도 다 컸구나. 

큭큭거리며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웬지 모르게 속이 시원했다. 따지고 보면, 인생이 눈물짓는 신파인 게 그리 부끄러운 일도, 화낼 일도 아니니 말이다. 예전의 나는 여전히 낭만을 꿈꾸며 내 인생은 물론이고 영화 속 그녀들도 계속 멋진 모습 살아가주길 기대했던 것 같다. 나보다 잘 사는 언니들을 보며 대리만족도 느끼고, 영상에서 가십거리로 보여주는 각본 따위 믿지 않으려고 미리 그 많은 조사를 하고 갔는데 의외의 반전이었다. 오히려 심심했던 그 일상 덕분에 멋져보이고 싶었던 삶도, 때때로 상처도 받아가면서 살아가야 함도 인정하고 말았다. 이렇게 화려한 조명을 받는 여배우들도 결국 나이들어감에, 피해갈 수 없는 시련들에 눈물짓고 화해하며 사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새해를 몇 분 남겨놓지 않아서 그렇겠지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자니 기분 좋은 기대와 희망이 생긴다. 이제 막 20대를 보내며 30대를 맞는 내가 앞으로는 미지의 관중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는 삶’보다 여섯 명의 언니들처럼 당당히 드러내며 ‘내 삶’을 사는 여자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

2010년은, 꽤 멋진 한 해가 될 것 같다. 


교육사업팀 서영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