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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성(Sexuality)을 읽다./문화에서 성을 찾아내다

[영화] 다시 보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작성일 : 09-10-30 10:51             
[영화] 다시보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글쓴이 : 아하지기 (59.15.196.148)  조회 : 307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조제’의 매력을 뭐라 형용할 수 없었다.

겁에 질린 듯한 커다란 눈을 하고선 부엌칼을 휘두르는 하반신이 마비된 여자 아이. 느릿느릿한 말투로 ‘살모넬라’라든가 ‘루미놀 반응’이라든가 하는 살벌한 지식들을 주워 삼키던 그녀. 그러나 오타쿠라 하기엔 자기 감정에 참으로 솔직하고 강인했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바람 같았다.

‘오~ 조제!’싶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츠네오를 붙잡는 장면이었다. 1년 하고도 몇 달 뒤 츠네오와 쿨하게 헤어질 때가 아니라.

조제는 할머니 장례식 후 츠네오가 찾아 왔지만, 그의 말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는 가 버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떠나는 츠네오를 보며 조제는 ‘가란다고 진짜로 갈 놈이면 가란 말이야.’하고 츠네오의 등짝을 친다. 떠나는 남자에 대한 원망과 동시에 붙잡고 싶은 솔직한 마음이 응축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우선 솔직함이 감동스러웠고 뒤이어 그 명쾌한 표현력이 놀라왔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의 강인함이란 언제나 가벼운 바람 같아 유쾌하다. 


그 날 둘은 같이 자기로 한다. 조제가 이불을 깔고 옷을 벗는다. 정면에 츠네오가 앉아 있다. 츠네오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한다. “이런…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무엇에, 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던 것일까… 츠네오는 털털한 성격인 섹스 파트너와 벗은 몸으로 태연하게 얘기하고 식사도 하며, 뛰어나게 미인인 카나에와는 밀고 당기며 섹스를 시작한 연인 사이이다. 즉, 여자 몸이나 섹스가 전혀 새롭지 않을 인물이다.

츠네오의 감탄사 ‘이런…’과 함께 내뱉어진 눈물이란 단어.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당혹스런 시선. 나는 이 부분이 감독이 조제의 현실에 가미한 유일한 따뜻함이라고 생각한다. 결국은 츠네오가 언어화 하지 못하는 가슴 먹먹함일 뿐일지라도, 비록 여자 장애인의 얄팍한 가슴과 마비된 두 다리가 주는 이질감, 그것을 직접 접한 당혹스러움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츠네오가 이를 회피하지 않고 눈물로 느낄 때 둘 사이에 서늘한 바람이 불지 않았을까. 차라리 솔직하게 내뱉어졌기에 감정이 부대끼지 않고 소통하는 서늘한 바람 말이다. 둘은 실제로 너무나 즐겁게, 기쁘게, 사랑스럽게 섹스한다.

조제를 얘기할 때면 ‘바람’이란 이미지를 붙여 주고 싶다. 실로 조제란 이름은 일본어로 ‘카제’, 즉 바람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이는 그녀의 원래 이름이 아닌데, 조제가 좋아하는 프랑스 작가 사강의 소설 속 주인공 이름이다. 즉 이를테면 조제가, 아니 쿠미코가 선택한 예명인 셈이다. 쿠미코란 이름은 찾아 보니 ‘영원히 아름다운 아이’란 뜻이다. 그 이름을 버리고 조제란 이름으로 불리길 바란 ‘조제’. 잠시 뻔뻔하게, 츠네오를 표절하자면, ‘이런… 눈물이 나올 것 같다’.


그런 조제를 처음 본때가 언제였더라... ‘눈물이 나올 것 같’았던 츠네오가 실은 우리 보통 사람들의 시선을 대변하며 조제를 장애인으로서 대상화하고 있다는 점을 깨달은 것은... 조제와 함께 있는 순간순간  스쳐 지나가던 인형의 모습이 사실은, 츠네오가 조제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는 것을 예전엔 왜 미처 몰랐을까. 헝겊대기로 옷을 기우고 단추 구멍 눈을 한 낡은 인형은 츠네오의 시선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동정적이되 적의는 없다.

츠네오가 조제를 떠나 ‘암호랑이’(원작에서 츠네오 캠퍼스의 여자들을 암호랑이로 비유하는 것에서 인용함)같이 두 다리 늘씬한 카나에게로 갔을 때, 도로 변 차들이 왕왕 시끄럽게 지나간다. 그래서 츠네오가 오열하듯 우는 소리는, 갑자기 나타난 듯한 스피디하고 시끄러운 세상에 묻혀 버린다. 아니 사실상 우는 소리도 못 내는 그억거리는 울음이었던 것 같은데, 워낙 시끄러운 도로변의 차들이 울음소리를 삼킨 듯이 느껴진다. 사람 없는 아침이라던가, 천천히 흐르는 구름이라던가 하는 조제의 느릿한 세계와 참으로 대조적이다. 결국 둘은 각자 세상의 무게를 합치지 못한 것이다. 서로 적대적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카나에의 시선은 훨씬 야멸차다. 그녀의 늘씬한 다리 사이로 벽장 속에 누워 있는 조제의 헝클어진 머리통을 비추는 장면은 그 화면 구도만으로도 위압적이다. 그 위로 내리 꽂히는 ‘집에서 다이빙 한다는 그 건강한 여자아이’란 말은 조롱을 넘어 사뭇 잔인하기까지 하다. 장애인을 추켜세우는 우호적 평가 뒤에 숨은 우월감이 더 이상 숨지 못하고 쌕쌕 새근대는 것이다. 

이에 굴하지 않고 하반신 마비를 연애의 ‘무기’로 쓸 수 있는 내가 부럽다면 ‘너도 다리를 잘라’라고 단호히 말하는 조제는 역시 솔직하며 강인하다. 그러나 쓰레기를 버려 주는 대가로 가슴을 만지게 해 달라는 옆집 아저씨의 착취적인 태도 앞에서 조제의 강인함은 과연 무슨 소용일까? 서로가 서로의 몸을 이용할 뿐이라고 자위하는 정도 아닐까. ‘뿌리부터 잘려 나가 완전히 말라비틀어진 몸뚱아리’일 뿐이니까 라고.

조제는 스스로를 빛도, 바람도 없이 적막 자체였던 해저에서 살다가 츠네오와 최고로 야한 섹스를 하기 위해 뭍으로 올라온 물고기라고 말한다. 해저에서는 외로운 것도 몰랐지만, 이제 츠네오가 사라지고 나면 ‘길 잃은 조개껍질처럼 해저에서 데굴데굴 굴러’ 다닐 거라고. 하지만 ‘그런대로 나쁘진 않다고’.

그렇다. 그런대로 나쁘진 않단다. 다행이다. 츠네오의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이런...’에 이어 조제의 현실에 감독이 가미한 마지막 나지막한 따뜻함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지글지글 구워지는 죽은 물고기 보다는 해저를 데굴데굴 굴러다닐 조개껍질이 좀 더 참을 만하니까. 서늘한 바람이 조금이라도 불 것 같기 때문이다.


아하! 서울시립청소년성문화센터
상담사업팀 이호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