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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성(Sexuality)을 읽다./섹슈얼리티 아티크

이태원, 가려진 이야기들: 영화 <이태원> 리뷰

메인 포스터

 

1970년대 이태원에는 미군 남성들을 위한 ‘유흥’ 업소가 즐비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이태원을 ‘후커힐’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 시기부터 30년째 이태원을 준거지로 삼고 있는 세 사람이 있다. 바로 삼숙, 나키, 영화다. <이태원>은 이들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운다. 
 물론 제목이 드러내듯이 영화는 이태원의 장소성에 대한 숙고로부터 출발했다. 강유가람 감독은 이 공간이 기지촌에서 시작해 2010년대에 이르러 젊은 ‘힙스터’들이 모이는 이국적 공간으로 인식되기까지의 변화에 관심을 가진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과거의 흔적을 ‘헐어버리며’ 재개발을 주도하는 이들이나, 여성을 매개로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모이던 이들의 이야기인 것은 아니다.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변인’으로 소외된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삭제된 목소리를 서사화하기 위해 감독은 ‘피해’ 대 ‘가해’의 구도를 선택하지는 않는다. 현실은 그렇게 일관적이고 명확하지 않다. 익숙한 피해자 서사를 그리는 대신에 그는 삼숙, 나키, 영화의 삶을 더 입체적으로 조명하기를 택한다. 세 여성의 기억은 성산업 종사 경험으로만 묶이기에는 서로 너무나도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삼숙 테마 포스터
나키 테마 포스터
영화 테마 포스터


 삼숙(77)은 소위 ‘핫한’ 컨츄리 클럽을 운영했고, 현재도 운영하는 자영업자이다. 재력으로 원 가족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고, 클럽에 고용한 웨이트리스들이 미군과 결혼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한다. 나키(75)는 남편의 가정폭력을 피하기 위해 웨이트리스 일을 시작했지만 삼숙과는 다르게 ‘외국 놈’이라면 치가 떨린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당시 유흥 업소 종사 여성들을 외화를 벌어들이는 ‘국보’로 생각한다.* 영화(58)는 화교 출신으로 클럽에서 자칭 ‘양갈보’ 생활을 했다. 미군과 결혼해 미국에 가보는 것이 꿈이었고 이 꿈을 이룬 뒤 남편 없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들 모두 각자의 경험 속에서 스스로의 삶을 적극적으로 변호한다.
 이태원의 변화 또한 이들에게 다른 방식으로 다가온다. 당시 비싸기로 유명했던 ‘레게 머리’를 할 정도로 부유했던 영화였지만 이제는 처지가 달라졌다. 조카 양육비를 두고 남동생과 다투며 단칸방 살이를 한다. 영화의 여동생 역시 미군과 결혼했지만 연락이 끊긴 지 20년이 지났다. 하지만 영화는 이 모든 변화에 시큰둥한 태도로 일관한다. ‘양갈보’였던 과거는 대수로운 일도 아니다. 그에게 관심은 오직 온라인 게임뿐이다. 나키는 생계유지에 어려움을 겪으며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고용주의 말에 일희일비할 정도로 더없이 불안정하다.** 한편, 삼숙은 ‘사장’으로서 아직 가게를 지키며 나중에 호텔을 짓고자 하는 거창한 꿈도 있다. “라이프 이즈 숏!”이라는 모토를 내세우는 모습은 ‘대장부’처럼 느껴진다. 이 당당함이, 변화하는 장소성으로 인해 쇠락해가는 삼숙의 클럽과 함께 배치되며 쓸쓸하게 느껴진다. 
 그 이상으로 삼숙을 위협하는 것은 ‘양갈보’라는 낙인이다. 서양인 남편과 결혼했다는 사실로 인해 겪었던 경멸 어린 시선은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삼숙은 끊임없이 ‘양갈보’ 생활을 한 종사자와 아닌 종사자인 자신 사이의 선을 긋는다. 성산업에 종사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가게 웨이트리스였던 여성들을 만나면 모른 체해주는 게 암묵적 룰이다. 스스로 체화한 사회적 낙인과 그로 인한 불안은 삼숙 특유의 쿨한 성격과 불협 화음을 만들어낸다. 강유가람 감독은 이태원이 이들의 역사를 삭제하는 방식으로 재개발되고 있는 이유를 이러한 ‘낙인’에서 찾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세 여성에게 이태원은 가장 편안한 ‘나와바리’다. 나키는 이태원은 “내가 나쁜 년이 아니란 걸 알고 다 인정을 하는” 곳이라 설명한다. 그 증거로 동네에서 일하는 트랜스젠더들에게도 자신이 꼬박꼬박 인사를 받는다는 점을 덧붙인다. 이 세 여성이 재개발과 관련된 소문을 계속 부인하는 것도 이태원에 대한 그들의 애정이 얕지 않음을 증명한다. 이태원은 삼숙, 나키, 영화에게 오랜 세월이 쌓인 삶의 현장이다.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단순하게 해석할 수 없는 그 광경이 이방인들에게 때로 모순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삼숙, 나키, 영화의 이야기는 종종, 청년 예술가들의 목소리와 겹치며 흥미를 더한다. 이태원 우사단로를 중심으로 예술 활동을 하고자 모였던 이른바 ‘문화기획자’ 청년들도 젠트리피케이션을 맞닥뜨리며 공간 밖으로 내몰린다. 이태원을 자본의 논리로부터 지켜내는 일은 어렵기만 하다. 하지만 이들 또한 현재의 이태원에 주목할 뿐, 이태원이 가진 역사성에 주된 관심을 두고 있지는 않다. 이들과 이태원 원주민인 세 여성은 같은 공간을 두고 평행선을 걷는 듯이 보인다. 한 청년이 ‘윤락 여성과 윤락 업소’라는 표현을 쓸 때 잠시 지었던 머뭇거림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남긴다.
 영화는 이태원을 둘러싼 많은 장면을 포착하면서도 어떤 결론을 강요하지 않는다. ‘여성’이자 ‘노인’이며 한때 ‘유흥 업소 종사자’였던 삼숙, 나키, 영화의 일상을 특별한 것으로 다루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담아냈다는 점도 <이태원>이 담고 있는 많은 가치 중 하나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인천인권여성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이룸영화제 등에서 주목받았던 <이태원>은 강유가람 감독의 첫 극장 개봉작이 되었다. 2019년 12월, 미공개 씬이 추가되는 등 재편집을 거쳐 개봉할 예정이라고 한다. 영화 촬영 당시 루머에 지나지 않았던 이태원 재개발이 현실화되어 한창인 지금, 관객들에겐 <이태원>이 어떤 메시지로 다가올지 궁금하다.

 

*)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이해관계에 따라 미군 남성 대상 성산업을 묵인하고 때로는 조장했다. 이 과정에서 특정 지역의 성산업 종사자들을 애국자로 칭하며 적극 관리하는 모습도 보였다.

**) 강유가람 감독은 나키의 분량이 삼숙에 비해 적은 이유를, 본인 소유 사업장과 같은 자유로운 촬영 장소를 찾을 수 없는 현실적 어려움 때문이라 말했다.

 

글. 기획협력팀 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