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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성(Sexuality)을 읽다./섹슈얼리티 아티크

“위로라는 말로는 부족한 어떤 만남” 영화 '벌새' 리뷰

[섹슈얼리티아띠끄]

위로라는 말로는 부족한 어떤 만남

 

 영화 '벌새' 리뷰

 

 -영화내용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교육팀. 엄진

 

 중학교 때 대치동에 있는 큰 영어학원을 3년 내내 다녔다. 사는 곳은 신대방동이었지만 외고 준비반에 다니기 위해 대치동 행을 택했다. 학교가 끝나면 교과서가 그대로 담긴 가방을 메고 곧장 지하철 역으로 달려가야만 겨우 시작 시간을 맞춰 또 다른 교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넉넉한 사이즈의 교복, 몸집만한 책가방, 규정에 한 치 어긋나지 않는 단발머리에 힘없는 안경을 쓰고, 지하철 안에서의 긴 시간을 워크맨안의 팝송 테이프와 영어듣기 테이프로 채워가며 부지런히 신대방동과 대치동을 오가던 그 시간들을 나는 참 외롭고, 조금은 쓸쓸했던,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무력했던 날들로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15살 은희가 만난 세상이라는 짧은 설명으로 표현된 벌새라는 영화를, 전 세계적으로 25개의 상을 수상했다는 이 영화를 보기까지 기대를 하면서도 망설였다. 영화를 보면서 한동안 꺼내보지 않았고, 한번도 달래주지 않았던 오랜 기억 속의 15살 여중생을 마주하고 너무 우울해질까봐.

 

  정말 한동안 기억 속 아주 깊은 곳에 밀어 넣어두었던 15살 여자아이가 거기 있었다. 10만 돌파 기념 손편지에서 김보라 감독은 이 모든 걸 기억하는 나는 이상한 걸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었다고 한다. 김 감독의 말처럼 영화에는 은희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아주 디테일하게 보여진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분명 존재했지만 너무 일상적이라서, 현실이라서, 사소해서 지나쳤을 순간들.

 

  어떤 드라마, 영화의 소재도 될 수 없을 것 같은 은희의 평범한 일상. 영화를 통해 그 일상을 다시 만나는 시간은 내가 정신없이 살아내는 데만 몰두해 지나쳐왔던 감정들을 마주하게 한다. 사실은 폭력적이었고, 사실은 억압적이었고, 사실은 너무 외로웠고, 사실은 무서웠고, 답답했고, 무력했던, 하지만 그냥 그렇게 지나온 그 시간들을 영화는 보여준다. 사랑, 희망, 꿈과 미래를 정답으로 전시하는 세상 속에서, 정작 내 주변의 구질구질한 현실은 낯설게 다가온다. 은희가 마주한 현실은 버겁다. 무례한 어른들, 폭력적인 남성들, 쉽게 변하는 사랑, 친구의 배반, 갈등이 가득한 가족, 내가 선택하지 않은 가난, 은희는 어디에서도 답을 찾을 수가 없다. 15살에게는 자유도, 힘도 없다. 친구와 함께 트럼플린을 뛰거나, 혼자인 집에서 음악을 크게 틀고 방방 뛰는 것이 유일한 자유고, 부모님의 잔소리에 나 안이상해! 안이상하다고!’ 소리치며 부리는 객기가 최선의 힘이다.

 

  그런 은희에게 한문 선생님인 영지는 마음 둘 곳이자, 의지할 만한, 믿을 만한 어른이다. 꾸밈없는 모습으로 지친 은희에게 말없이 따뜻한 차를 건네는 영지. 아빠와 오빠가 선망하는 S대를 다니면서도, 거침없이 담배를 피우는 자유로운 여성의 모습에서 은희는 동경과 해방감을 느낀 게 아닐까? 영지는 은희에게 긍정적이지 만은 않은 세상의 단면들을 알려주고, 그러면서도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이야기한다.

 

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 . 서로 얼굴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가득하지만

마음까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은희야 너 이제 맞지마. 누가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 알았지?”

 

 

  보통 영화 중간 중간, 슬픈 장면에서 눈물이 나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잔잔히 지켜보다가 영화가 다 끝난 뒤 울음이 터져나왔다. 공중에 떠있기 위해서 1초에 80번 이상 날갯짓하는 벌새처럼 어리고 작은 몸으로 세상을 버텨왔던 시간들에 대한 기억과 그 외로움과 지쳤던 시간들을 겪어온 것이 사실은 혼자가 아니었음을, 우리는 같은 기억을 안고 여전히 오늘을 살아가고 있음을 영화가 보듬어주는 것 같아 눈물이 났다. 그때의 나에게 애썼다고,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어도 그럴 시간이 없었는데 '벌새'는 나에게 그런 시간을 주었다. 영화는 수많은 은희들을 불러냈고, 어느 덧 영지가 된 은희들은 서로에게 차를 건넬 수 있었다. 그래서 우려했던 것처럼 우울하지 않았다. ‘벌새’. 감독의 말처럼 위로라는 말로는 부족한 어떤 만남같은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 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벌새의 포스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