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외톨이, 그들은 진정 버림 받아야 하는가..

작성일 : 05-06-13 11:37             
세상의외톨이,그들은진정버림받아야하는가..
글쓴이 : 아하지기 (210.181.81.157)  조회 : 594  
 
 
≪ 세상의 외톨이, 그들은 진정 버림 받아야 하는가.. 


작성자 : 문 일식 



세상은 그들에게 냉혹했다. 그들의 삶은 세상 자신의 삶과 확연하게 달랐기에 그들은 고통 속에서 탈출구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들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2000년 말. 난 동성애자들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들의 언어로는 이반(남성 동성애). 혹은 레즈(레즈비언의 약자, 여자 동성애)라고 하는 동성애들의 세계... 일반(동성애자들의 자신들과 이성애자들을 구별하여 부를 때 사용함)으로서 동성애자들의 세계에 발을 드민다는 것은 힘든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일반이라고 밝힌 나를 아무런 티끌 없이 받아 주었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여름의 심야 시간에 이태원을 나갔다. 물론 이반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게이 클럽들이 즐비한 이태원의 구석진 골목을 살짝만 돌아보면 곳곳에서 성접촉을 하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심하면 성관계까지도 가끔 눈에 띈다. 처음 그런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심각한 충격을 먹었었다. 하지만 그러한 행위들은 세상과 단절된 그들이 욕구를 푸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땐 슬퍼졌다. 우리의 단절 선언이 그들의 퇴폐적 문화를 만들어낸 것이라는 생각에. 

처음엔 나도 동성애자들에 대하여 혐오를 느꼈었다. 내가 받은 교육, "남자는 여성과 결혼하고, 여성은 아이를 낳는다. 그렇게 가족은 형성되고 후에 다 자란 자녀들이 결혼하여 손자를 낳고.." 라는 교육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남성과 남성 (혹은 여성과 여성)이 서로를 사랑하고 관계를 맺고 아이를 입양하여 키운다? 선뜻 이해하기 힘든 사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나를 이끌어준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 일식아, 너는 이해할 수 없을 거야. 나도 처음엔 그랬으니까. 하지만 이것만 알아주라. 우리들은 너희들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어. 단지 사랑하는 상대방의 성(性)이 자신과 같을 뿐이야. 그 외엔 너희와 같아. 사랑이나 마음이나.. 혹은 이별이나. 

그리고 나를 저의 친구들에게 소개했다. 그들은 처음엔 일반인 나를 의심, 혹은 경멸의 눈으로 쳐다보았다. 내가 그들을 보듯이 말이다. 그 눈빛을 받으며 난 속으로 씁쓸히 웃었다. 그들을 향한 우리의 시선이나 우리를 향한 그들의 시선이나 모두 같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자리에 앉고 술이 돌았다. 그들은 내가 생각해온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친구의 말대로 모두 나와 똑같았다. 갖고 있는 생각, 마음, 행동까지도. 난 그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을 이해하고 함께 해준 덕분이었을까. 내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동성애자들은 그들이 모일 때면 항상 나를 찾곤 했다. 

고등학교 생활을 하느라 시간이 나지 않은 내가 빠지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들이 날 빼먹고 부르지 않은 적은 없었다. 그들은 나를 친구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반 친구가 아닌 일반친구로서, 자신들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세상인으로서 말이다. 내가 그들과 지내면서 안 것은 동성애자들 자신들도 그 모습이 천차만별이라는 점이었다. TV는 순전히 거짓말이었다. 정말 남성의 기질을 가진 이반도 있었고, 순수한 여성 기질을 가진 레즈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여성스러움을 가진 이반도, 남성스러움을 가진 레즈도 있었다. 또 어중간한 위치에서 있는 이반, 레즈도 있었다. 나로선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까지 동성애자 하면 잔뜩 여성스러움을 가졌거나(남성) 남자인 척 하려고 애쓰는 (여성) 모습만을 떠올리던 나에겐 말이다. 그렇게 난 조금씩 동성애자들에 대하여 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2003년 말. 난 이반들과 교제를 맺어온지 3년이 되었다. 처음엔 몇 명 안 되던 친구들이 그들의 소개, 소개로 수십 명으로 불어났다. 매일 같이 전화통화를 하고,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는가 하면 수능이 끝나 한가한 요즘엔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고 있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나는 분명 일반이다. 하지만 내 주위 친구들엔 이반은 물론 레즈들도 있다. 이런 나의 모습에서 동성애자들이 우리와 다르다는 사실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부분 부분 다른 면도 있겠지만 삶 전체를 본다면 우리와 같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들을 세상에서 내몰고 상처 주며, 쓰레기 취급을 하는 것일까. 가치관의 차이, 그것 때문일까? 아니면 단지 혐오스러울 뿐일까? 하지만 명심할 것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배척하지만 그들은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육우당(六友堂)이라는 이반이 있었다.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나와 같은, 열아홉이었던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이 싫다며 스스로 목을 매었다. 그의 이름 육우당은, 그 스스로가 지었던 아호로 자신이 가장 아끼는 여섯의 친구를 상징했다. 그 친구란 "술, 담배, 묵주, 파운데이션, 수면제, 녹차"였다. 술과 담배, 그리고 수면제. 이것에서 그가 받았을 엄청난 스트레스와 고통을 알 수 있다. 묵주, 이것에서 우리는 그의 신상심이 얼마나 강하였는지 알 수 있다. 녹차, 이것에서 우리는 그의 심성을 알 수 있다. 적어도 그는 자신의 맑은 심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그가 자신의 꿈이었던 시조시인을 포기하고 죽음으로 향하도록 만든 것은 누구였을까? 

난 그와 개인적으로서의 친분관계는 맺지 못했다. 언젠가 서로 만나 악수만을 나누었을 뿐, 그 이상의 관계는 만들지 못했었다. 그렇지만 난 언제나 그의 편이었다. 그는 학교에서 커밍아웃을 했던 것이다.. 물론 부모님에게도 자신의 정체성을 밝혔다. 그리고 그는 버려졌다. 진실을 말한 죄로. 

육우당의 경우처럼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십대 동성애자들이다. 특히 남성동성애자들은 거의폐인의 생활을 하다시피 하는 이들도 많다. "청소년 흡연자=동성애자"란 공식은 성립하지 않지만 "청소년 동성애자=흡연자"라는 공식은 거의 맞아 떨어질 정도로 십대 이반들은 대부분 담배를 피운다. 이틀에 한번씩은 모여서 술을 마시고, 한 달, 혹은 두 달에 한번 아니면 더 자주 섹스를 한다. 그들에겐 임신의 걱정이 없다. 그러니 더더욱 섹스를 즐긴다. 장소가 여의치 않은 이반들은 화장실과 같이 불결한 장소에서 관계를 한다. 콘돔을 사용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살과 살을 있는 그대로 접촉한다. 키스를 하고, 애무를 하고, 삽입을 한다. 그리고 결국 그들이 얻는 것은... 만신창이의 몸과 정신일 뿐이다. 

난 그들의 퇴폐적 삶을 고발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문제는,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나 하는 점이다. 나는 그것을 세상의 단절에서 찾았다. 뻔한 답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진실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동성애자라는 점을 밝힐 수 없다. 그랬다간 육우당과 같이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니까. 

그렇다고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부인할 수도 없다. 이러한 갈림길의 중앙에 선 그들은 동성애자인 자신을 보통의 세계에 익숙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성격은 양면성을 띄게 되고, 어떻게든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숨기기 위해 조심에 또 조심을 해야 한다. 그러한 스트레스를 평소엔 술과 담배로 누르지만 동성애자들끼리 모였을 땐 성(性)적인 것으로 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사회로 돌아온다. 그것은 일종의 순환선상에 있다. 자전거 페달을밟아 앞으로가는 것처럼 그들은 순환적인 생활을 하면서 점점 나이를 먹어가는것이다. 

이지련씨의 소설 중에 "새디"라는 소설이 있다. 킬러인 두 동성애자에 대한 얘기를 흥미롭게 서술한 이 책은, 하지만 중요한 요소가 한 가지 빠져있었다. 그것은 "세상으로부터의 핍박"이었다. 그들은 아무런 배척도 받지 않는다. 미화에 또 미화를 덧붙였을 뿐, 진실한 생활은 보이지 않는다. 그 책은 오히려 "팬픽이반(실제로는 동성애자가 아니나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들을 동성애자로 하여 팬픽 소설을 쓰거나 혹은 즐기는 사람 주로 여성)"들에게 동성애자들의 삶이 아름답다고 선전하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진실은 모두 버리고 이상만을 담은 왜곡된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그것이 동성애자들의 삶을 더욱 힘들게 했다. 이반 소설 속의 아름다운 사랑이 왜 자신에겐 실현될 수 없는지에 대하여 절규하는 사람도 있었다. 혹은 로망스를 찾아 끊임없이 헤매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두운 그늘 속에서 그들을 구해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동성애가 청소년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감안 할 때 무엇보다도 교육이 가장 큰 위치가 될 것이다. 우리의 성교육은 이성간의 관계에 대한 것뿐이다. 동성애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그들을 어떤 시선을 봐야 하는지에 대해선 아무런 교육도, 말도 하지 않는다. 그 결과 이성끼리의 교제만을 교육받아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성애자들을 혐오하고 배척하고 버린다. 그것을 막기 위해선 학교의 성교육 시간의 막간을 이용하여 동성애에 대한 교육을 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필요한 것이 지금 우리가 가진 경직된 사고를 바꾸는 것이다. 동성애는 태곳적부터 이 땅위에 존재했다. 그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세상의 한 일원으로서 동성애를 받아들이고, 그들을 이해하고, 감싸 안아 줌으로서 퇴폐적인 문화를 방지하고 이성간의 사랑과도 같은 사랑을 그들도 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떳떳하고 행복한 사랑을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세상이 전부인 줄로 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만이, 우리의 사고방식이 인정하는 것만이 진실로 존재하는 세상인줄로 아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의 세상이 있듯이, 인정하기 싫다 해도 동성애자들의 세상은 존재한다. 

외면하려 해도 그들은 우리의 눈 안에 든다. 그렇다면 공존해야 하지 않을까? 가치관과 정체성은 뒤로 미루어 두고 같은 인간으로서, 사랑이라는 같은 감정을 가진 동물로서 말이다. 그것이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