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하! 십대의 물결/10대들의 성(性) 이야기

[수상작] 금붕어 두 마리

작성일 : 05-08-18 12:07     
▷ 금붕어 두마리 ◁
글쓴이 : 아하지기  조회 : 628  
 
<SEXUALITY 愛 상> 
≪ 금붕어 두 마리 ≫

- 금산여고 정은경
 
 


처음에 이건 꿈이라고 생각했다. 꿈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어쩌다가 나는 지금 대전이라고 적힌 톨게이트를 지나고 있는가. 그래, 이건 틀림없이 꿈이다. 나는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 하지만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상쾌하게 내 머리를 스쳤다. 꿈에서도 상쾌함을 알 수 있는가. 초여름에 불어오는 그 바람의 맛을 꿈에서도 알 수 있는가. 나는 순간 의문에 휩싸였다. 

하지만 나는 곧 이것이 현실임을 알아냈다. 그녀의 담배 연기가 상쾌한 바람과 함께 날리고 있었다. 상쾌한 바람은 그렇다 치고, 나는 꿈에서 단 한 번도 그녀의 담배 연기를 본 적이 없다. 

그러니 이건 꿈이 아님이 확실하다. 나는 머리를 흔들어 본다. 무언가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먼저 그녀와 나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눈 앞에 보이는 것은 긴 가로수와 목적지를 향해 나 있는 아스팔트 길. 간혹 휴게소와 표지판 따위가 보이기는 하나 유난히 낮은 그녀의 차에서는 하늘 만큼 솟아 있는 표지판을 읽을 수 없다. 나는 다시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는 여전히 한 손으로 운전대를 한 손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내가 눈을 감기 전에도 그녀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한 손으로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차도 여전히 달리고 있었으며 그녀의 눈도 여전히 초점이 없었다. 유난히 날리는 그 짧은 머리카락, 그녀에게 어울리는 짧은 머리카락 역시 계속해서 흔들렸다. 다만 눈을 감기 전에는 목적지가 있었다. 나는 집에 들어가면 먼저 목욕을 하고 잠을 잘 계획이었다. 그리고 낮잠을 실컷 잔 후에는 아껴 두었던 라면 한 봉지를 끓여 먹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계획대로라면 라면을 끓여 먹고 있을 이 시간에 나는 냄비 앞이 아닌 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 있다. 도대체 그녀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어디 가는 거예요?" 

그녀는 아무 말이 없다. 나는 재차 묻는다. 어디로 향하고 있냐고. 
그녀는 피우던 담배를 밖으로 던지고는 바람에 날리는 머리를 쓱, 올린다. 

"글쎄... 정말 어디로 가는 거지?" 

그녀는 깜짝 놀란다. 그리고 오히려 나에게 반문한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냐고. 하지만 나는 알아낸다. 그 물음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의 눈빛, 손을 집어 넣으면 끝도 없어 결국에 내 몸까지 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그리 깊은 눈빛. 그 눈빛이 앞을 바라보는 것도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도 그렇다고 나를 바라보는 것도 아님을 나는 알아냈다. 그녀는 다시 담배 갑에서 담배를 꺼내 문다. 라이터를 켜고 불을 붙인다. 담배 연기가 입에서 흘러나온다. 어디로 향하고 있는 지도, 내가 왜 이 차에 타고 있는지도 그녀는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졸지 않고 내려 달라고만 했어도 그녀는 순순히 목적지에서 나를 내려 주고는 그녀의 목적지를 향해 떠났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졸았다. 그녀는 나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어쩌면 그녀의 현실, 그녀가 돌아갈 상황, 모든 것을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고 서야 알지 못하는 어떤 곳을 향해 달리는 지금의 상황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긴 숨을 내쉰다.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다. 그녀 역시 그렇다고 결론을 내린다. 

작은 휴게소에는 겨우 서너 대의 차만이 주차해 있다. 그 서너 대의 차마저도 전부 트럭인데 바퀴에서는 아직도 마른 흙먼지가 폴폴 풍겨 나오는 것 같다. 그녀와 나는 휴게소 안, 식당에서 우동을 시킨다. 물수건과 수저가 식당과는 다르게 제법 정갈하다. 나는 그녀를 바라다본다. 그녀도 나를 바라보는데 어떤 의미 있는 눈빛은 아니다. 

"정말 몰라. 모른다구!" 

그 말을 해 놓고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그녀는 계속해서 웃어댄다. 
하지만 그 웃음조차도 그녀에게서 풍겨 나오는 어떤 우울함처럼 공허할 뿐이다. 우동이 나오자 그녀는 웃음을 멈추고 거의 그릇에 얼굴을 박고 먹기 시작한다. 나도 연신 젓가락질을 해 보지만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없다. 우동은 탁한 어항을 연상시킨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나는 어서 내 머릿속에서 어항을 지우려 한다. 하지만 이제 우동 그릇에서는 죽어 가는 금붕어의 흐릿한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그것이 살려 달라 말하는 것인지 어떤 것인지 신음소리까지 들리기 시작한다. 나는 머리를 흔든다. 지금 나는 무엇을 보는 것인가. 금붕어라니, 우동 그릇 속에서 죽어 가는 금붕어라니. 그녀가 일어선다. 그녀의 우동 그릇은 말끔히 비워져 있다. 그녀는 계산을 하고는 거침없이 나간다. 또 나를 잊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뛰어 나간다. 그녀의 등 뒤에 대고 소리친다. 

"이제 정말 어디로 갈 작정이죠?" 

그녀는 돌아보지 않는다. 그녀의 차는 곧 출발할 것 같다. 
나는 뒷 자석에 처음과 같은 포즈로 앉는다. 

차는 어느 원통 세계에 갇혀 있는 것 같다. 가도 가도 똑같은 길, 나무, 느껴지는 바람까지도. 다른 길은 보이지 않을 것만 같다. 그녀는 또 담배를 꺼내 문다. 지독한 골초라고 생각한다. 할머니 앞에서는 도대체 저 담배를 어떻게 참아 냈을까 싶을 정도로 내 앞의 그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나는 그저 시트에 깊숙이 몸을 박고 반복적인 풍경들과 바람을 느낄 뿐이다. 이제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따위의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특별한 이유랄 것도 없을 것 같고, 그녀에게 내 궁금증을 물어 본다고 한들 그녀 역시 특별한 대답을 해 줄 것 같지 않다. 서서히 졸음이 다시 몰려온다. 마치 눈앞에 CNN 뉴스가 나오는 지루한 텔레비전을 보는 것처럼 내 눈은 감긴다. 

세상은 어둡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내 손을 움직여본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다. 발을 움직여 본다. 역시 미세하게 떨릴 뿐이다. 나는 서서히 내 몸을 감싸는 따뜻한 물의 감촉을 즐긴다.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처럼 평화롭고 나른한 향기가 내 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 그러다 나는 어떤 차가운 금속 물체에 눈을 번쩍 뜬다. 그것이 내 몸을 찢는다. 내 손가락과 발가락, 그리고 머리까지. 모든 것이 찢겨 나가고 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나는 놀라 눈을 뜬다. 새 소리가 들린다. 국화꽃의 향기가 비릿하게 내 속을 울렁거리게 한다. 보이는 것은 이제 막 새색시처럼 피어난 국화꽃과 이름 모를 잡초들이 이루는 길, 그리고 그녀가 핸들 위에서 엎어져 있다. 나는 가만히 그녀의 모습을 바라본다. 그녀의 어깨에서 작은 파동이 일어난다. 울음소리가 곧 새 소리에 묻혀 버리지만 나는 그녀가 울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낸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고 차에서 내린다. 그 원통 세계에서 벗어난 듯 지루한 도로와는 다른 길 위에 내가, 그녀가, 그녀의 차가 서 있다. 

나는 지금 요정의 속삭임처럼 지나가는 바람이 도로 위의 바람과는 다르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앞으로 걷는다. 서서히 움직인다. 


나는 마당에서 글자 연습을 하고 있었다. 글자 쓰기는 그 시절, 내가 가장 즐겨 하는 취미 생활이었다. 특별히 어떤 단어를 쓴다거나 문장을 쓰는 것은 아닌데 부러진 나뭇가지를 들고 아니면 짝을 잃은 젓가락을 들고 ㅁ을 쓰면 ㅏ를 쓰고 또 그 밑에 ㅎㅅ이라는 받침을 넣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글자를 쓴다는 것, 그것은 나만의 기쁨이었다. 그래서 영자 언니는 나를 '허난설헌'이라고 불렀나. 꼭 그리 훌륭한 여자가 되라고 그렇게 불렀나. 영자 언니네 집에는 자두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그런데 그 자두나무가 무얼 먹고 그리 크는지 해마다 온 동네 사람들을 다 나누어주고도 남을 정도로 열매를 맺는 것이다. 나는 노랑색 바탕에 하얀 나비가 그려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치마를 입고 폴짝 폴짝 뛰어 자두를 따 먹고는 했다. 그렇게 맛있는 자두를 따먹고 영자 언니네 대문을 나 올 때, 

그래 그 때였다. 막내 삼촌의 손을 꼭 잡고 집 골목으로 걸어 들어오는 그녀, 지금처럼 짧은 머리카락에 노랑색 원피스를 입고 하얀 샌들을 신은 그녀. 그녀의 아랫배는 둥근 공을 넣은 것처럼 작게 튀어나와 있었다. 그녀의 부풀어 오른 배를 본 순간 나는 왜 그리 달음질을 쳤는지, 등 뒤에 내 이름을 다정히 부르던 삼촌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왜 눈물이 났는지. 나는 방으로 뛰어 들어와 이불을 머리까지 올리고 눈물을 닦았다. 내가 무얼 예감이라도 했던 것일까. 그래, 예감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어떻게든 떼라도 써봤을 거 아닌가. 그녀는 안 된다고, 그녀는 안 된다고... 

그녀가 할머니께 절을 했다. 할머니는 그녀의 배를 먼저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할머니의 막내며느리 감은 누가 뭐라 해도 영자 언니였다. 어디 할머니 뿐이었겠는가. 동네 사람 모두는 막내 삼촌과 영자 언니가 천상배필이라고 했다. 하지만 결국에 승낙하며 할머니가 중얼거리시던 말처럼 사람이 어디 뜻대로 되는 것인가. 사람 관계도 그저 한길로 흐르기만 하는 물 같으면 좋겠다고, 영자 언니의 손을 꼭 잡으며 할머니가 말했던가. 물 같으면 좋겠다고. 

그저 정해진 길로만 흐르는 물 같으면 좋겠다고. 영자 언니는 울지 않았다. 사실 그 밤, 운 건 몰래 자는 척하던 나였다. 할머니가 영자 언니의 등을 쓸어 주는 그 손길에도 절대 영자 언니는 울지 않았다. 괜찮아요, 어머니. 영자 언니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참말 괜찮아요, 어머니. 거짓말장이, 영자 언니. 나는 참말 괜찮다 하더니 그리 아파하고, 그리 많이 울었나. 삼촌은 영자 언니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전하지 않고 떠났던가. 그것은 그저 실수였다고, 단 한 번의 실수였다고, 나는 그래도 너를 사랑한다고... 그 말 한 마디 전하지 않고 떠났던가. 

밤새 울어 퉁퉁 부운 얼굴로 누워 있던 영자 언니의 손을 잡으며 내가 말했다. 

"언니야, 삼촌은 나쁜 놈이다. 까짓 거 나랑 결혼하면 되지 않아." 

나는 알고 있었는데, 그런 걸 배신이라고 한다는 사실은 나는 
알고 있었는데 왜 언니는 끝까지 드라마에 나오는 다른 시련 당한 여자들과는 달리 삼촌의 신의를 지키려고 했나. 

"아니야, 삼촌은 나쁜 사람이 아니야. 자신의 실수를 책임지는 것은 당연한 거야." 

웃지 말지. 그렇게 말하면서 웃기까지 하다니, 그래서 나는 영자 언니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미치지 않고 서야 한 번의 실수로 떠나간 그 사랑을 왜 끝까지 가슴에 안고 있었나. 터져 죽었다. 가슴이 터져서 죽었다. 

나는 죽은 영자 언니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사람들이 말하기를 차마 감지 못하고 죽은 눈이 웃고 있었단다. 그 때부터 자두나무도 서서히 죽어가기 시작했다. 그 푸른 잎이 말라 가더니 가지가 축축 늘어져 그 해 겨울을 지낸 후에는 다시는 새싹을 내놓지 못했다. 나는 그녀를 특별히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오늘 그녀가 집에 왔을 때도, 단지 정말 타이밍을 잘못 맞췄다고 생각했을 뿐 그녀가 정말 정말 미운 건 아니었다. 

"그래, 정훈이는 좀 괜찮냐? 니가 고생이다. 니가 고생이여. 내가 가보지도 못하고, 그게 또 나를 보면 얼마나 속상하겄냐. 지 몸뚱이 그렇게 된 것도 다 사고였지만서도..." 

그녀는 고개를 떨군 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긴, 그녀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시어미니 앞에서 대소변은 고사하고 눈 깜빡이는 것 밖에 할 줄 모르는 아들 흉을 볼까, 아니면 정말 힘들어서 미치겠다고 하소연을 할까. 나는 되도록이면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삼촌이 다친 후로 언제나 그녀 앞에서 쩔쩔 매는 듯한 할머니의 모습도 보기 싫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녀의 입과 그저 멍한 시선을 보내는 그녀의 눈초리도 싫었다. 

"할머니, 저는 이만 가볼게요. 내일 학교 가려면 준비할 것도 있고“ 
"자취하느라고 밥도 제때 못 챙겨 먹을 텐데 좀 기다렸다가 저녁이라도 먹고 가지 그르냐." 
"아니에요. 저 밥 잘 먹고 다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버스 때문에 지금 나가야 할 것 같아요." 

그 때, 처음으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저도 이만 가볼게요. 가는 길에 은경이도 
집까지 태워다 주고." 

할머니는 무언가 할 말이 입안에서 맴도는 듯 저, 저, 하다가 

"그래, 바쁜 사람들은 어여 가야지." 

하고 말았다. 가는 길에 그녀는 고추장 한 단지와 들기름이 든 병, 
그리고 할머니가 특별히 맞추신 부적을 챙겨 들었다. 나오면서 그녀는 끝까지 괜찮다고 사양했지만 이런 것들마저 안 가져 가면 내 마음이 편하겠냐는 할머니의 사설에 마지못해 트렁크를 열었던 것이다. 나는 뒷 자석에 앉았다. 후끈한 열기가 채 빠져나가기도 전에 그녀는 마을을 떠났다. 그리고 나는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 

잠깐 영자 언니를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고 병상에 누워 있는 삼촌을 생각하며 ‘나도 실수를 했을 뿐이야…….’ 라고 나를 위로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서서히 졸리는 내 눈에 낯설지 않은 풍경들이 스쳐 갔다. 

시골길은 생명이 있는 흙과 풀꽃들, 오직 숨을 쉬는 것들만이 길을 이루고 있다. 나는 뒤돌아본다. 저 멀리, 그녀의 프라이드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나는 다시 앞을 본다. 길은 끝이 보이지 않고 양옆으로 벼가 자라고 있는 논은 초록을 머금은 바다처럼 출렁출렁 파도를 친다. 나는 저들의 숨소리를 듣는다. 눈을 감고 내 몸을 저들 속에 묻는다. 하, 이 순간만은 나는 없어져도 좋다고 생각한다. 내 속에서 작은 씨앗이 눈을 뜬다. 

나는 가만히 배를 쓸어 본다. 열 아홉 살 짜리가 저지른 실수, 그렇게 이름 붙이기엔 결과가 너무 크다. 그 아이의 얼굴을 생각해 본다. 하지만 떠오르지 않는다. 애쓰면 애쓸수록 더욱 더 흐려져만 간다. 


여름, 나는 집을 나왔다. 고3, 그것은 나를 답답하게 했고 단지 그저 바다가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나는 고민이 많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나와 대화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서서히 움직이는 기차에 앉아 큰 딸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새벽부터 교회에서 기도를 하고 있을 엄마의 모습을 생각하며 울었다.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는데…. 

모래 사장에 앉아 한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를 보면 무언가 내 속에서 뚫린 줄 알았는데 더 큰 막막함이 내 속으로 밀려왔다. 그 때, 아이를 만났다. 우리는 그저 대화를 했을 뿐이다. 그러다 문득 화가 치밀어 올랐다. 
‘삶이 이렇게 지루하게 흐르다니!!’ 

우리는 금지되어 있는 모든 것들을 다 해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밤 거리를 미친듯이 돌아다니다가 잠이 들었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아이는 사라졌다. 나는 한 동안 그 민박집의 방에 누워 작은 꽃무늬의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젯 밤, 도대체 우리가 무슨 짓을 했는지. 생각해 보면 불평들을 쏟아놓고 우리의 젊음을 배설해 버렸을 뿐이었다. 친구들 중에는 그런 아이들이 많았다. 남자 아이들과 어울려 잠자리를 갖는 아이들. 그들은 하나 같이 이렇게 떠들어 댔을 뿐이었다. 

“마땅히 할 일이 없잖아.” 

뻔한 청소년 성 상담/윤리교육. 그런 것들은 더이상 우리에게 가르침도 일말의 망설임이나 양심적 가책에 대해서도 일러주지 못했다. 그리고 정말 우리는 할 일이 없었다. 우리는 우리대로 노는 방식을 만들었을 뿐이었다. 

“변명이라고 해도 좋아. 장난이었어. 그래서 널 버릴거야.” 

그녀의 하얀색 프라이드 앞에 왔을 때 그녀는 누군가와 전화를 하고 있는 듯 하다. 나는 주저앉는다. 창문 너머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냥, 귀에 대 주시기만 하면 되요." 삼촌과 통화를 하려는 모양이다. 삼촌은 그야말로 식물인간이 되었다. 

퇴근길에 가로수를 들이받았다고 한다. 그녀도 같이 있었지만 그녀는 정말 말짱했다. 그래서 나는 삼촌이 금방 깨어날 줄 알았다. 하지만 열흘 후, 그는 전신마비라는 판정을 받았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건 삼촌이 가로수를 들이받은 날 비가 많이 왔다. 별이 총총 떠 있는 밤에 이상하게 비가 많이 왔다. 

"나야. 듣고있는 거지? 미안하다는 말 안 할께. 너도 이해할 거라고 생각해. 하긴 니가 이해하긴 뭘 이해하겠어. 뭘, 대체 뭘 이해하겠어. 내가 이렇게 떠나가도 니가, 니가 뭘 이해하겠어. 아직도 기억해. 도대체 그 여자가 뭐지? 영자, 도대체 너에게 그 여자가 뭐였니? 그 밤, 마지막으로 니가 했던 말이 그 여자 이름이었어. 그깟 가로수 나무를 보고 니가 외쳤던 말이 영자야, 그거였어. 니가 그 여자를 죽인 것도 아닌데 넌 왜 그렇게 괴로워했니? 매일 밤마다 니 옆에 있는 건 난데 왜 그 여자를 꿈꾸니? 너에게, 너의 가족들에게 도대체 그 여자는 뭐였니? 왜 나는 그 여자만큼 인정받지 못하는 거니? 제발 말해봐! 어차피 뱃속의 아이 때문에 나를 선택한 거라면, 책임감 때문에 나를 사랑하려고 애쓴 거라면 끝까지 했어야지. 왜, 왜 너는, 아무 말이라도 해 봐. 제발 아무 말이라도!!“ 

그녀 뱃속에 있던 아이는 죽었다. 삼촌이 어떤 이유에서든 합법적인 남편이 된 뒤 얼마 되지 않아 아이는 유산되었다. 아이가 그녀의 뱃속에서 죽던 날, 영자 언니도 함께 떠났다. 

그녀가 운다. 나는 그녀가 이렇게 우는 줄 몰랐다. 제 가슴을 쥐 뜯으며 저리 슬프게 우는 줄 몰랐다. 곧 그녀의 심장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다. 심장뿐만이 아니라 그녀 속에 쌓인 모든 것들이 울부짖는 그녀의 눈에서 귀에서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만 같다. 나는 가만히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다 다시 주저앉는다. 어느새 밤은 깊었다. 나는 무릎을 감싸고 기대어 눈을 감는다. 

나는 잠에서 깨어난다. 도로, 바람, 그리고 흐린 눈동자의 여자. 나는 순간 무엇이 현실인지 꿈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마치 어제 일이 꿈인 것처럼 그녀의 울음소리를 꿈속에서 들었던 것처럼 나는 다시 변함 없는 도로를 달리고 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본다. 정확히 그녀의 담배 연기를 바라본다. 갑자기 그녀가 입을 연다. 

“죽었대. 그이가." 

나는 너무 놀라 입이 제대로 열리지 않는다. 

"누, 누구.. 삼, 삼촌이요?"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인적이 드문 휴게소로 들어간다. 
나는 갑자기 목이 메었다. 물이 먹고 싶어졌다. 그녀는 차에서 내려 등을 기댄체 어떤 생각에 잠긴 듯 하다. 나는 차문을 열고 식당으로 향했다. 그녀가 뒤에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낳아라. 그냥, 그렇게 해라.” 

나는 뒤돌아 보았다. 그녀가 희미하게 웃으며 떨어트린 담배를 
발로 비비고는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절벽으로 추락했다. 모든 것이 그저 꿈같다. 나는 이 비극적인 꿈에서 깨어나고 싶다. 

눈을 뜬다. 머리 속이 하얗다가 다시 정신이 든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런 무늬가 없는 천장과 형광등. 나는 눈동자를 굴려 본다. 

“정신이 좀 드세요? 다행이에요. 아기는 무사해요.” 

휴게소에서 쓰러졌는데 누군가의 도움으로 병원에 실려온 모양이다. 
그녀는 죽었을까? 가장 먼저 든 생각이다. 나는 간호사에게 혹 이 병원에 실려온 시체는 없는지 물어보려고 하다가 그만둔다. 

“가족분들에게 연락해 드릴까요?” 

내 팔에 주사를 놓으며 간호사가 묻는다. 

“아니에요. 조금만 있다가요.” 

응급실인듯 여기저기 통곡소리와 아이들의 자지러질듯한 
울음소리가 섞여 들려온다. 나는 한동안 누워있다 병원을 나온다. 

밖은 어둠으로 가득찼다. 나는 처음 와보는 어느 도시의 밤을 거닐고 있다. 마지막 그녀의 말이 떠오른다. 어떻게 내가 임신한 걸 알았을까. 정말 모든 게 꿈 같다. 뱃속의 아이도 그녀의 죽음도 하나같이 모두 악몽같다. 그러다 이것이 꿈인들 현실인들 어떠랴. 나는 살아가야만 하고 내 삶은 수없는 실수를 되풀이 하기에 나는 책임을 져야만 하는 것을.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남은 아기를 쓸어보았다. 내 장난에 벌을 주려고 아기는 그렇게 버티고 있는 것일까. 그럼, 벌을 달게 받는 수 밖에. 그 방법 밖에 다른 방법은 없는 것 같다. 

흐린 어항 속, 금붕어 한 마리. 홀로 걷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