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하! 에는 어떤일이?

초보 성평등 교육 활동가의 고군분투기

 

아하 20주년 발간 리포트 초보 강사 에세이_이한

<초보 성평등 교육 활동가의 고군분투기>

아하!서울시립청라소년성문화센터의 20주년을 맞아 실무진 선생님께서, 교육 활동가의 이야기를 들려달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아직 에피소드랄게 많지 않은 초짜인지라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누구에게나 다 처음은 있는거니까요. 강의를 앞두고 손톱을 물어뜯은 기억, 참여자의 질문에 머리가 하얗게 된 기억, 밤잠을 설치고 알람보다 빠르게 일어나 부랴부랴 강의를 준비했던 기억이 저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떨리고 설레는 마음, 누군가는 공감 되어서 웃기고, 누군가는 초심이 떠오르기도, 누군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할 지도 모를 그 순간들을 나누어볼까 합니다.

 

강의 일주일 전, 강의안을 깎는 노인의 심정으로 애먼 PT를 여기에 붙였다, 저기에 붙였다 반복합니다.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진 강의안이라는 걸, 교육 참여자일 때는 왜 몰랐을까요. 그때의 업보라 생각하며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강의안에 관심을 갖게 만들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강의안을 준비합니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진 편입니다. 이전에는 강의안 사이사이에 써먹을 농담까지도 고민하느라 한달이 부족했었으니까요.

강의가 하루 앞으로 다가오면 최대한 경건한 몸과 마음으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술이나 자극적인 음식도 피합니다. 언젠가 교육 활동가 양성과정에 오신 선생님께서 초보 활동가들을 어여삐 여기샤 그런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좋은 선생님이 되기까지 500명이 넘는 참여자에게 빚을 지고 시작하게 될 거예요.” 무수히 많은 실패와 좌절에 포기하지 말라는 선생님의 말씀이었지만 저는 지금도 그 얘기가 무섭습니다. ‘내가 괜히 500명에게 폐를 끼치는 것은 아닐까.’ 오늘도 빚을 갚기 위해 강의안을 숙지합니다. USB에 담긴 강의안이 괜히 무겁게 느껴집니다.

강의 날 아침은 최소 세 개의 알람으로 대비합니다. 그래도 아직은 알람이 울리기 전에 일어나는 날이 더 많습니다. 기차를 놓치고, 학교를 잘못 찾아가고, 늦잠을 자는 꿈에 시달리기 일쑤거든요. 가는 길과 강의 현장도 두 세번씩 확인한 후, 출발합니다. 교육 시간은 정신없이 지나갑니다. 강단에서 일인극을 하는 연기자도 됐다가,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됐다가 엄중한 재판관에 빙의하고 공감하는 친구가 되어주기도 합니다. 사실 아직 어떤 모습이 좋은지, 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서 교육은 늘 어렵고 힘이 듭니다.

온통 어렵고 힘들다는 투정만 가득한데, 저는 왜 계속 교육을 할까요?

2015, 페미니즘의 도 모르고 성평등의 도 모를 때, 한 단체에서 폭력예방교육을 들었습니다. 못해도 150~200명은 모아둔 대강당에서 진행하는, 지금 생각하면 정말 최악의 환경에서 진행 된 강의였습니다. 어떤 선생님이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그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애처롭고 또 신기하여 눈길이 갔습니다. 사례로 들었던 이야기가 마음을 울려 한동안 만나는 사람마다 그 이야길 하고 다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강사들 사이에서 사례로 많이 인용되는, 적극적인 목격자가 되어야 한다는 류의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후 당장 다음부터 슈퍼파워 페미니스트가 되거나 세상을 바꾸는 활동가가 되겠다는 다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후의 삶에서 성평등과 관련한 이야기에 한 번이라도 눈이 더 갔던 건 그때 땀을 뻘뻘 흘리며 어려운 강의를 이어갔던 그 선생님 때문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강의가 참 좋습니다. 지금 당장 변화를 만들기는 어려워도, 교육 참여자의 동공이 흔들릴 때, 어느 순간 그 가슴에 씨앗이 심어진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심어진 씨앗이 지금 당장 꽃을 피우지 않더라도 또 좋은 때를 만나 싹이 틀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저 역시도 그렇게 조금씩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오늘도 사과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강의안을 깎습니다. 언제 다 클 줄 몰라도 사과나무는 곧 사과 숲이 되겠죠. 이렇게 함께하는 선생님들이 계시니까요.

모든 선생님들께 감사하고 존경한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험난하고 어려운 시기, 무수히 많은 실패와 좌절을 넘고 활동해주셔서,

이렇게 초짜 활동가가 주제넘게 글을 쓰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쪼록 무탈하게 베테랑 활동가가 되어 지금의 글을 우스워하는 그날까지 정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아하!서울시립청소년성문화센터의 20주년을 축하하며 글 줄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성평등 교육 활동가 이한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