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작] 어린 거북을 비웃는 상어가 되기까지

작성일 : 06-06-01 09:58     
어린 거북을 비웃는 상어가 되기까지
글쓴이 : 아하지기  조회 : 437  
 
[아하! 성 이야기 작품 공모전]
<섹슈얼리티 知상>


 
< 어린 거북을 비웃는 상어가 되기까지 >


- 동성중학교 이한결




< 재수 없는 날 >
 


‘난 재수가 더럽게 없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 생리를 시작했던 날. 
가뜩이나 친구들보다 성장속도도 빠르고 생각하는 것도 달랐는데 남들은 다 애기취급 받을 나이에 나는 여자가 되는 의식을 홀로 치룬 거다. 참 재수도 없지. 여자가 된 게 창피한 일이 되어버리다니.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얼굴이 빨개졌다. 엄마는 무덤덤하게 반응하더니 집에 오자마자 “괜찮아?” 이러는 거였다. 아빠가 있는 상황에서! 아빠는 당연히 뭐가 괜찮냐고 물어봤고, 온 가족이 다 알게 됐다. 아, 짜증나는 궁뎅이 아줌마. 이런 일일수록 신중하고 여성스럽게 처리하는 건데. 아빠한테는 비밀스럽게 알려줘야 드라마가 척척 맞는 건데. 어쨌든 할아버지도 있고 7살짜리 동생도 있는 상황에서 나는 공식적으로 여자가 되었다. 

“그래?” 
“쩝쩝” 

한명이라도 껄껄껄 웃어넘기거나 축하해주거나 등을 두드려줬으면 따듯한 분위기로 넘어가 나는 아침에 하는 성장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가족의 우스운 축하를 받으며 창피해하는 거였는데, 다들 ‘그래?’ 라는 둥 별 말도 없이 삼겹살만 꾸역꾸역 넘기니 내가 더 이상해지고 말았다.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었다. 
촌스럽게 챙겨 입는 내복을 갈아입으러 안방으로 들어간 엄마를 쫄랑쫄랑 따라가니 엄마가 또 무덤덤하게 그러는 거였다. 양말을 훌렁훌렁 벗으면서. “한결이는 다른 애들보다 좀 빨리 시작했네?” 

아, 절망. 또 절망. 

엄마가 “휴, 한결이는 늦어서 많이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이야.” 라고 했으면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 이었을 거다. 난 이런 거 말고 다른 걸로 고민을 했을 테고. 아, 덜 성숙해서 별로 걱정해야 할 것 없는 어리광 부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어서 열 받는다. 하나님은 왜 맨날 내 편이 아닌 거지. 어린 영혼을 고민의 도가니탕으로 집어넣다니. 
이제 키도 안 자랄 테고, 가슴도 자꾸 커질 테고, 다른 애들은 수영할 때 나는 수영 못할 일도 생길 테고, 수업시간에 어지럽고 배도 무지하게 아플 텐데 어떻게 하지? 열한 살 밖에 안 된 나한테 더럽게 무서운 시험에 들게 하셨다. 하나님은 나를 엄청 많이 과대평가 한거다. 이런 건 정말 자신이 없다. 어린 나이에 나만 이런 걸 경험해야할 정당한 이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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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것들 > 

여자애들은 가끔씩 얼굴을 할퀴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아니면 팔뚝을 꼬집거나 머리카락을 다 뽑아버리거나. 여자 애들은 입을 함부로 놀려서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어버린다. 순진하고 아무것도 몰랐다는 이유 아래에. 

그렇게 상황파악을 못하고 상대방의 감정을 못하면 쓰나. 무턱대고 “가슴이 크다” 하면 아무리 조심스럽게 말해도 상대방의 기분이 더러워지는 거다. 특히 나 같은 경우엔. 신기한 걸 발견하면, 그리고 그게 친구의 일이라면 마음에만 간직하면 되지 그걸 또 “어머! 너” 어쩌내 저쩌내. 그렇게 말하면서 들춰내야 하나. 

4학년 때 일이다. 동네에 살던 친한 친구와 놀기로 약속해서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근데 친구가 표정관리를 못하는 거다. 무식한 계집애. 내 삐죽 못생기게 튀어나온 가슴을 보면서 놀라고, 또 뭔가를 물어보고 싶은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더니 또 물어보고 만다. “가슴...” 무슨 말을 할 줄은 안다. “언제 그렇게 자랐니?” 이정도? 

기분이 더러웠다. 순진한건지 무식한건지 상황파악을 못하는 건지. 친구라면서 그런 부끄러운걸 보면 감춰줘야 하는 거 아닌가. 집으로 바로 올라가서 헐렁헐렁한 옷으로 바꿔 입었다. 바꿔 입고 나오니 이번에도 흉부 쪽으로 눈이 간다. 

무식한 계집애. 무식한 계집애. 표정관리 하나도 못하는 무식한 계집애. 기분이 더러워서 2시간 놀 걸 1시간 놀고 들어와 버렸다. 윗옷이 몸에 많이 달라붙지 않도록 상체를 뒤로 빼느라 제대로 놀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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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아직 판판해요! 브라도 안한다고요!’ > 

일요일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가족 다같이 교회에 갔다가 집으로 왔다. 엄마가 차를 세우더니 속옷 가게에 들른다. 그러더니 회색, 흰색 스포츠 브라를 검정색 비닐봉투에 싸서 사왔다. 그러더니 대 낮에 차 안에서 그걸 입어보라는 거다. 결국엔 입어 봤다. 답답해도 덜렁덜렁 추접스런 걸 생으로 옷 안에 감추고 다니는 것보단 낫다. 
 
입고 보니 숨을 쉴 수도 없는 거다. 옷 안에 뭐 하나가 더 있다는 것도 불편하고 꽉꽉 조이는 것 같고 가슴도 더 커 보이는 것 같고. 괴로워서 땀이 나고 짜증이 났다. 그래서 브라 앞부분을 쭉 빼고 있었다. 툭 튀어나온 뽕이 보였다. 이게 더 커보이게 하는 거였군. 꼴 보기 싫고 흉해서 그것도 빼버렸다. 엄마는 자기일이 아니라고 그렇게 딸을 이해 못하나보지. 창피해서 도로 아스팔트에 떨어진 기름이 되고 싶은 내 심정을.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있는 가슴을 ‘난 아직 판판해요! 브라도 안한다고요!’ 하고 부정하고 싶은 내 심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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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들과 똑같이 > 

난 TV에서 커다란 여자를 보면 힘차게 욕을 해준다. “아, 뭐 저렇게 흉하게 커” 하고. 나보다 어린 나이에 생리를 시작했다는 애 이야기를 들으면 인상을 찌푸리며 이상하다고 해준다. ‘나는 절대 그러지 않은 것처럼’ 나와 그들이 다른 처지에 있는 것처럼. 나는 그런 것에는 고민 따윈 없는 것처럼.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 나처럼 똑같이 상처받았으면 좋겠고, 나처럼 똑같이 아팠으면 좋겠고, 나와 같은 이유로 부끄러웠으면 좋겠다. 못됐다고 해도 좋으니 남들도 나처럼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고민을 했으면 좋겠다. 나에게도 남들과 똑같이 공정한 상황이 주어졌으면 좋겠다.
 
정신적인 성숙을 주려고 이렇게 시련을 주시는 거라면 나도 무식하고 골비고 내숭떨고 어린 내 또래가 되고 싶다. 철이야 언젠가 들 텐데 왜 내가 먼저여야 하는 거지. 난 절대 풍만한 엄마 같은 친구는 되기 싫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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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소원도 뺏어가시나요 > 

어쩔 수 없는 일은 수긍해야 하는 게 법칙인가보다. 한달 만 하다가 4년만 멈추고 한 중2 때쯤 시작했으면 하고 빌었던 생리는 내 소원은 싸그리 무시하고 한달에 한번씩 규칙적으로 나왔다. 가방 아무도 모르는 곳에 생리대 숨기기, 친구들 안보일 때 가방에 있던 생리대 주머니로 옮기기, 수영하러 갈 때 나는 못 간다고 할 번드러진 핑계 만들기, 생리통이 있을 때 체육시간에 요령부리기 등 ‘김치는 이렇게 담궈야 맛있단다.’ 하는 세월의 경험과 지혜로 넘쳐나는 늙은 할머니처럼 나는 다른 애들은 모르는 여러 늙수구레한 ‘생활의 지혜’를 터득했다. 

밤마다 성장 판을 주먹으로 쳐 내린다. 그다음 밤에 자기 전에는 다리를 쭉 뻗고, 그걸로 효과가 없을 것 같으면 자세를 쭉 펴고 왕자의 키스를 기다리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자 잔다. 그렇게 하면 키가 좀 자랄 것 같아서 나중에 효과도 별로 없고 상당히 귀찮은 일이라는 걸 깨닫기 전까지는 계속 그렇게 했다. 조금이라도 키를 키워놔야 했다. 난쟁이 똥자루라고 놀림 받는 서러움까지는 난 필요 없단 말이다. 
 
현실이 짜증나고 하나님을 욕하고 싶을 때나 성장 판을 주먹으로 내리친다. 내가 생리가 터진 것 까진 참았지만 반에서 가장 크던 내 키를 자꾸 훔쳐가는 건 못된 일이다. 

눈치 없는 친구들은 그런다. “어? 한결이가 나보다 컸는데 이젠 내가 좀 더 크네?” 그러면서 좋다고 또 실실 웃는다. 하하하. 이빨이나 부러지라지. 그래. 너희 키 열심히 커서 좋겠다. 에잇. 이빨이나 부러져라. 
날마다 나는 이룰 수 없는 소원을 비는 거다. 수영복 입을 때 볼록 튀어나오는 데가 없게 해주세요. 반 애들 중 아무도 내 어깨에 손 못 올리게 해주세요. 코딱지만큼도 안 먹힌다. 내 고통과 고민은 코딱지보다 못한 거라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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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의 힘 > 

어른들의 말처럼, 세월이 모든 것을 치료해주기도 하나보다. 5학년 때까지는 단단히 숨겨둬야 했던 내 비밀을 6학년이 되서야 털어놓을 수 있게 된 거다. 

6학년 올라오는 겨울 방학 쯤 되면 친구들이 하나둘씩 생리를 시작한다. 그럼 나도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척 하면 된다. 자연스레 나도 친구들과 같은 입장이 되는 거다. 그럼 생리통 땜에 배 아프다고 해도 좋고, 생리대가 없을 때 친구들에게 빌려도 괜찮고, 몰래 화장실에서 부스럭 소리 안 나도록 조심 할 필요 없이 친구들이랑 같이 화장실에 가도 되고. 

세상에 이렇게 편한 게 없다, 같은 입장이 된다는 것은. 그래도 중1이 되어 가장 편한 것은 친구들에게 가서 “생리대 있어?” 할 수 있다는 거다. 아줌마들끼리 “화장품 뭐 써?” 물어보는 것처럼 편하고 구수하게. 
생활의 지혜가 많으니 초보자들보다 편리한 것도 가르쳐 줄 것도 많다. 바지에 샜을 때 가리는 법, 무방비 상태에서 터져버렸을 때 대처하는 방법에는 내가 아직도 프로급이다. 이제 그건 부끄러운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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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얻는 건 있더라. > 

아직도 나는 자라고 있다. 뭐 이미 키 빼고 클 데는 다 컸지만.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성숙한 사람으로서 심장이 커가고 머리가 커가고 사고방식이 다양하게 자라는 거다. 미리 몸은 키워놨으니 이제 내 마음만 훌륭하게 키워놓으면 된다. 
그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다른 사람 때문에 기분 상하는 일도 많을 테고, 남들보다 차별될 일도 더 많을 거다. 하지만 두렵지 않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든 나는 분명히 해결책과 희망을 발견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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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어의 자신감을 부러워하라 > 

원하지 않았던 남들보다 빠른 성장과 성숙을 거부하던 때는 지났다. 잃는 게 있어야 얻는 것도 있는 거다. 평범함을 잃었지만 성숙함을 얻었다. 또래 애들보다 뭔가 꽉 찬 내가 될 수 있었던 거다. 아직도 불편한 점, 기분 상하는 점, 어린 계집애들의 이빨이 부러졌으면 하는 잠깐의 충동은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건 못생기고 쭈글쭈글한 거북이가 상어 앞에서 알짱대는 거랑 같은 거다. 내가 참을 수밖에. 꼬리 한번만 살짝 휘둘러도 나가떨어질 불쌍한 것에게 동정을 주는 수밖에. 아직도 남들과 달랐다는 사실은 바꿀 수 없지만 그래도 난 내가 자랑스럽다. 난 어린 거북이들을 비웃을 수 있는 상어가 된 거나 다름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