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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십대의 물결/10대들의 성(性) 이야기

바보상자가 만들어낸 우리의 성

작성일 : 06-04-28 09:32     
바보상자가 만들어낸 우리의 성
글쓴이 : 아하지기  조회 : 438  
 

<바보상자가 만들어낸 우리의 성> 

- 서울 성신여자고등학교 조희정



성(姓). 그것은 소위 말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우리 십대들에게 피부로 와 닿는 개념은 아니다. 어른들은 그런 우리에 대해 모를 때가 많지만 사실,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엔 누구나 자신의 탄생과정을 깨우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제대로 된 깨우침일까? 그것이 무엇을 통한 깨달음인지 어른들은 알고 있는 것일까? 

본래 한국인의 사고란 ‘솔직함’이나 ‘대담’과는 거리가 먼 것이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성에 대한 지식은 대부분 가정으로부터 얻은 것이 아닌,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인터넷이나 방송매체, 그리고 그것을 먼저 접한 친구들에 의해 알게 되는 것이다. 물론 직접적인 체험이 아닌 각자의 상상에 맡기는 언어를 통해. 혹은 그보다 한 발 앞서나가 직접적인 영상을 통해. 
 
누가 인터넷을 정보의 바다라고 말했는가. 인터넷은 그야말로 쓸모없는 정보의 바다이다. 제대로 된 지식을 찾기란 그야말로 동해바다 해변에서 바늘 찾기와 같은 것이다. 특히 성에 대한 지식의 대부분은 상업성에 찌든 자극적인 내용이 많기 때문에 올바른 성 지식을 쌓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닥치는 대로 지식을 흡수하는 우리 청소년들에겐 자극성이 강한 것일수록 더 쉽게 물들고 새 지식을 받아들이는 데에 인색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 문제는 우리가 성 지식을 일찍 깨우친다(물론 그 것을 깨우침이라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정당성이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지식을 먼저 접하기에 후에 올바른 지식이 전달되어도 그것을 수용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는 점이다. 소위 말하는 ‘야동’의 본목적은 ‘돈’이다. 어두운 돈 맛을 본 어른들이 또 다른 어른들을 위해 만든 영상이 우리 눈에도 보이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자신이 뜻하지 않는 경우에도 화면을 채우는 짜증나는 것임과 동시에 우리에게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진 성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제 갓 눈을 뜬 우리가 자극적인 ‘성’의 단면만을 접하게 되는 것은 이미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아직 성숙하지 못한 우리의 사고에 어른들 세상 속의 상업적 광고가 비집고 들어와 그것이 후대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 우리 대한민국 성문화의 앞날이 걱정된다. 

TV를 틀어보면 각 방송의 선정적인 내용들이 나날이 심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성인들의 눈높이에 맞춰 점점 그 수위가 높아지고, 그 전에 알아야 할 정보들은 가끔씩 ‘특집’이라는 수식어를 매단 채 우리가 학교에 가 있을 시간에 내보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세상이다. 그래, 그 안에서 비춰지는 성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방영되는 시간대의 비효율성이 또다시 문제가 된다. 왜 우리가 봐야할 프로그램들이 우리의 눈이 칠판을 향해 있을 때 방영되는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동시에 우리나라의 이른바 ‘시청률에 목매단’ 방송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방송국의 시청률을 의식한 개편 덕분에 우리는 또 다른 어른들이 만들어낸 ‘성’에 의존하고 그것이 ‘성’의 모든 부분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우물 안 개구리처럼 상업적 틀이라는 우물 아닌 우물에 갇힌 채 우리의 잘못된 깨우침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세상을 보는 관점은 자신이 가진 지식에 근거하여 형성된다. 그런데 우리가 자주 보는 드라마 속에서는 가끔 여성비하적인 발언과 함께 ‘성’을 비하하는 태도를 취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여기서 잠깐 여성을 비하하는 태도의 문제점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성이 있다. 만일 여성비하적인 태도를 포함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유교적 관점이 이런 식으로 계승된다면, 후에도 우리의 사고는 여전히 전통적가치관에 사로잡혀 ‘성’과 관련한 여성에 대한 시각이 여전히 비관적일 수 있다. 여성을 비하한다는 것은 바로 우리 모두의 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좀더 부정적으로 말한다면 여성비하는 남녀간의 또 다른 벽을 만들고 나아가서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개체가 동등한 조건에서 공존하는 것을 거부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면 남성들은 또다시 가부장적 사회에 길들여져 여성의 무한한 능력과 가치를 부정하고 한정할 것이며 결국은 물질적 문화수준에 의식적 문화수준이 따라가지 못하는 문화지체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청소년의 ‘성’이 위태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학교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학교에서의 성교육은 말 그대로 ‘형식적’이다. 정작 우리에게 절실한 교육은 이루어지지 않고 그 수업 내용의 99%가 성폭력에 대한 것들뿐이다. 초등학교 땐 ‘아직은 이르다’며 지나간 성교육. 중학교 땐 ‘이젠 애들도 다 안다’며 지나간 성교육. 우리에게 남겨진 지식은 무엇인가. ‘성’이 정말 무엇인지, ‘성’이 왜 아름다운 것인지는 모른 채 ‘소중한 것이니 지켜야한다’는 결론만을 내려준 채 우리의 비뚤어진 성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현재 우리는 가정에서의 대화를 충분히 이끌어내고 있는가. 이젠 부모님만큼이나 가까워진 tv, 인터넷, 그 외에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매체들…. 그것이 결코 우리에게 정확한 지식만을 전달하고 있노라 말할 수 있는가? 그 속에서 말하는 ‘성’의 모습은 앞으로 우리가 지켜야할 소중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날이 갈수록 방송국간의 시청률 경쟁에 시달린 드라마들 속의 성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비판할 줄 아는 눈을 길러야 한다. 

이제 우리는 ‘깨우침’이 아닌 ‘깨달음’을 알아야 하는 나이에 서있다. 혼자서도 충분히 옳고 그름을 생각할 줄 아는 우리는 청소년이다. 누가 건져주길 바라는 대신에 빠져들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가 접하는 것들을 너무 믿지는 말자. 우리가 보는 것들에 대해 언제나 비관적으로 생각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저 정보가 절대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그 흐름 속에서 온갖 것들이 판치는 요즘에는 지식, 특히 인간의 세상관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것 중에 한가지인 성에 대한 지식을 가려서 취할 줄은 알아야 한다는 가벼운, 그러나 중요한 경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