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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저 발언이 불편한 이유

작성일 : 09-11-30 21:41             
루저 발언이 불편한 이유
글쓴이 : 아하지기 (112.149.189.159)  조회 : 444  


최근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여성 대학생이 ‘키가 180cm가 안 되는 남자들은 모두 루저(loser)’라는 발언을 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서구인의 체형을 미의 기준으로 삼는 우리 사회에서는 모두가 키 크고 늘씬한 체형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180cm가 안 되는 우리 사회 대다수의 남성들이 모두 인생의 ‘실패자(루저)’라니. 평범한 한 대학생의 발언 속에서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서구 중심적 외모 지상주의가 극단적으로 드러나고 있어 참 씁쓸하다.

‘루저(loser)’ 발언이 방송에 나간 이후 많은 남성들은 너나할 것 없이 불편한 심정을 드러냈다. 한 네티즌은 키가 180cm가 안 되는 우리나라 최고의 재벌 기업의 총수와 그의 아들을 ‘루저’로 패러디하여 실소를 자아내기도 했고, 몇몇 남성은 본 방송을 기획하고 방영한 방송국을 상대로 정신적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기도 했다. 물론 신체의 ‘다름’을 하나의 ‘가치’로 생각하고 그것을 통해 사람을 평가하는 태도는 결코 용납되어서 안 되며, 따라서 본 발언에 대해서도 우리 사회가 분명히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현재 온라인 상에서 나타나는 일부 남성들의 반응은 이성적인 비판과 감정적인 비난을 넘어, 한 개인에 대한 집단 폭력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발언을 한 여성의 개인 홈페이지에 욕설을 담은 댓글을 다는 것은 기본이고, 토익 성적표와 장학금 신청 내역 등을 공개하여 개인의 프라이버시권을 침해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이 여성의 성형 수술 전 사진과 시술 부위 등을 폭로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 가장 경악할 만한 것은 다수의 남성이 이 여성을 쫓아가서 성적인 위협과 폭력을 가하는 시뮬레이션 게임까지 등장했다는 점이다. 그녀의 발언이 잘못된 것은 분명하지만, 일부 남성들의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인 반응은 솔직히 놀랍고 무섭기까지 하다.

<▲ 출처 : 위클리경향 '외모 지상주의 아픈 곳 건드린 루저 논란'>

그에 반면 여성들은 외모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경험하는 것이 일상다반사다. 미디어에서는 항상 못생기고 뚱뚱한 여성들을 희화화하거나 모욕을 주면서 웃음을 자아낸다. 몇 년 전 유행했던 남녀 연예인들의 ‘커플 게임 버라이어티’에서도, 예쁘지 않은 여성들은 늘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다. 유명 개그프로그램에서는 뚱뚱한 여성들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 단골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심지어 ‘성격 못된 여자는 용서해도 못 생긴 여자는 용서 못한다,’ ‘여자의 나이는 크리스마스 케잌과 같다. 스물넷일 때가 가장 값어치가 있고, 스물여섯부터는 가치가 없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오간다. 하지만 이러한 부당함에 대해 여성들이 공개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비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여성들이 문제제기를 하기라도 하면, 우스개 소리도 포용하지 못하는 속좁은 사람으로 취급당하거나, 억울하면 예뻐지라는 비아냥을 듣게 된다. 그러다보니 여성 스스로도 외모에 대한 차별에 저항하기 보다는 성형 수술과 다이어트로 예쁜 여성이 되는 것이 더 편리하다고 생각에 쉽게 빠져들고, 여기에 각종 미용 산업이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하면서 외모지상주의가 더욱더 심각해지고 있다.

이번 ‘루저(loser)’ 발언은 남성들도 우리 사회 전반에 팽배한 외모지상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동안 남성들은 외모로 평가받는 경우가 비교적 드물었지만, 외모지상주의가 더욱 심화․확장되면서 남성들의 가치를 평가하는데 외모가 중요한 기준이 된 것이다. 그동안 여성들의 외모를 평가하는 위치에 있었던 남성들은, 자신들이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외모로 평가받는 존재가 되자 매우 당혹스러운 동시에 심한 모욕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 일부 남성들이 도를 넘는 폭력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루저(loser)' 발언이 사회적 파장을 낳았을 때, 개인적으로는 이번 일을 우리 사회가 외모지상주의와 사회적 차별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반성하는 계기로 삼기를 바랬다. 남성들도 외모로 자신의 가치를 평가를 받는 것이 얼마나 부당하고 불쾌한 지 경험했으니 앞으로는 조금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작은 기대를 해 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올바른 접근은 찾아볼 수가 없었고, 발언 여성 개인에 대한 비난과 여성 일반에 대한 비하로 이어졌다. 무엇보다도 가부장주의 사회를 비판하고 성평등한 세상을 추구하려는 여성주의 시각이 더욱 발붙이기 어려운 분위기가 형성된 것 같아 참 안타깝다.

다행히도 현재 ‘루저(loser) 발언에 대한 비이성적 공격이 한풀 꺾이고, 우리 사회가 다소 냉정을 찾고 있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문제의 본질인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올바른 논의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인생의 가치관을 형성하기 시작한 청소년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많은 꿈을 지니고 있는 청소년들이 외모 때문에 상처입거나 좌절하지 않도록, 외모의 차이를 ‘차별’이 아닌 ‘다름’으로 받아들이는 사회를 추구해야 한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독자위원 이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