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대처 매뉴얼에 대한 고민

작성일 : 11-08-30 11:06             
성폭력 대처 매뉴얼에 대한 고민
글쓴이 : 아하지기 (61.78.145.50)  조회 : 288  


약자의 딜레마는 약자이기 때문에 사회적 폭력과 차별에 무력하게 놓이지만, 동시에 그렇게 자신에게 다가오는 부당한 일 한 건 한 건에 넋 놓고 있을 수만도 없다는 점이다. 강할 수 없어 약한 것인데, 또 더 약해지지 않기 위해 강하기도 해야 한다는 존재론적인 역설. 이것은 성폭력 예방교육에서도 숙제다. 성폭력은 강자, 남성중심적인 사회가 행하는 구조적인 폭력이기 때문에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고 피해자는 저항할 수 없었으며, 결코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탓해서는 안 된다는 점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예비 피해자는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냥 사회적 대책을 기다리면 된다는 것은 약자 된 사람에게 계속 무기력에 처하라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결국 약자의 살아갈 방도는 중요한 문제다. 처한 상황을 건너뛰지 않으면서도 현재 상황에만 갇히지 않고 싶은 욕구를 실현할 방법이 있어야 한다. 두려움은 계속되겠지만 무기력하지만은 않을 수 있도록. 

7월에 보건복지부, 인구보건복지협회가 발간한 <중학교 교사를 위한 성교육 매뉴얼>은 성폭력 위기 시에 “나를 지키기 위해서 ‘거친’ 방법도 불사”하라고 조언했다. ‘안돼요 싫어요’라고 말하기 같은 방법은 너무 수동적이고 큰 효용도 없고 성폭력에 대해 간단하고 안이한 이미지를 심는다는 것이다. 예로 1000m 밖에서도 들릴 만큼 큰 소리로 악쓰기, 남성 급소를 발로 차는 연습하기를 제안한다. 이에 대해 반발이 일었다. 한 교육 분야 남성 블로거는 “발로 차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행동이고,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아이가 아니라, 침착하고 현명하게 대처하는 아이가 되도록 교육을 해야 한다”고 비판했고,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육체적인 훈련도 중요하지만 가해자를 심리적으로 누를 수 있는 대화의 기술도 중요하다”며 육체적 저항에 실효가 있는지 반문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위에서 언급된 모든 방안은 현재로서 다 ‘넘사벽’이다. 저 매뉴얼이 나왔다고 해서 갑자기 예비피해자의 생명이 위험할 거라고 맹비난하기에는, 그 전에 매뉴얼을 받아 든 교사들이 학생에게 시범을 보일 수 있어야 하고, 위기의 순간에 닥친 학생이 수업 내용을 떠올려야 하고 와들와들 몸이 떨리는 와중에도 정신을 챙기며 앞뒤 보폭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현명하고 침착한 대응, 가해자를 심리적으로 누를 수 있는 대화의 기술은 어떤가. ‘상대를 화나게 하면 안 된다’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흔히 이를 강조하는데, 가해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눈빛과 표정을 깊이 살피면서 의중을 읽고, 무섭지만 무서운 기색 없이 태연한 척 자연스럽게 상대와의 대화를 유도하는 것, 보통 밀당과 협상의 경험이 있지 않고서야 어렵지 않겠는가. ‘안돼요, 싫어요.’도 사실 쉽지 않다. 작은 목소리로 짧고 굵게 던지든, 큰 목소리로 눈빛을 쏘며 내지르든, 어린 사람의 자기주장에 허용적이지 않은 분위기에서 저 말을 하는 순간을 언제 연습해볼 수 있을까. 


나는 이러한 액션을 중학생이 스스로 몸을 움직여 해볼 수 있는 수준에 일단 이르렀으면 좋겠다. 무예를 배우기 시작할 때 상대를 화나게 할까 봐 걱정하거나, 경청하는 법을 익힐 때 사기를 당할까 봐 지레 겁먹지는 않듯이. 무엇을 쓸지 말지, 어떤 것이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는 그것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판단이 가능하다. 내공은 몸과 정신에 함께 쌓인다. 

눈치챘을지 모르겠지만, 앞에서 언급된 모든 종류의 대응 방법은 공통적으로 ‘몸적’인 대화다. 상대의 눈을 바라보는 것, 말로 대화하는 것, 소리치는 것. 상황을 파악하는 것과 특정한 말과 행동을 취하는 것도 모두 몸, 생각, 마음이 같이 움직여야 가능하다. 이게 성폭력에 특효다, 쥐약이다, 확언하는 것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약자들이 특정한 위기 상황을 떠나 그보다 먼저 자기 몸과 마음의 주인이 되도록 돕는 일이다. 강한지 강하지 않은지 미리 재단할 수 없다. 두려움도 어떻게 돌보냐에 따라 나를 질식시키기도, 나에게 용기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성폭력도 안 당하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건 이후 몸과 마음의 변화를 잘 알아채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 

이 매뉴얼이 성폭력 상황을 제압하게 될지, 생명을 위협하게 될지 모르겠다. ‘솔까말’ 먼 미래일 것이다. 일단 가을이 되면 학생들이 이 장을 소리 내서 천천히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자기 귀에 들리는 그 성폭력의 위기와 대처에 관한 문장들이 어떤 힘을 주는지, 혹은 어떤 두려움을 일으키는지 느껴보고 서로 눈빛을 나누며 이야기해보았으면 한다. 일단 그것부터 해보면 어떨까. 


한국성폭력상담소
전(前) 활동가 김민혜정


커버 사진 작품:
Change Begins Here, 
By Trista Morgan, Pennsylvania, US 
For the campaign against school violence
From http://www.flickr.com/photos/tristaem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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