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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십대의 물결/10대들의 성(性) 이야기

인형의 집

작성일 : 06-09-13 15:43     
인형의 집
글쓴이 : 아하지기  조회 : 462  

 
아하! 청소년 성 이야기 작품 공모전 공모작

- 인형의 집 -

최한희



 <노라> 저는, 제 자신을 되돌아보고, 주위를 잘 판단할 수 있도록 홀로 서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더 이상 당신 곁에 있을 수가 없어요. 지금 당장 이 집에서 나가겠어요. 

<헬머>아무런 경험도 없이 당신이 그처럼 일시적으로 욱하는 마음에서 앞 뒤 분별도 없이…! 당신의 가정, 당신의 남편, 그리고 당신의 아이를 버리고 나가다니! 생각 좀 해봐요.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할 건지! 

<노라> 그런 건 개의치 않아요. 저로서는 이렇게 하는 것 밖에 길이 없답니다. 

<헬머> 당신은 자기의 신성한 의무를 저버리겠단 말이오? 남편에 대한 의무, 아이들에 대한 의무가 있지 않소? 

<노라> 저한테는 그 밖에 그에 못지 않은 신성한 의무가 있습니다. 자기에 대한 의무입니다. 

<헬머> 당신은 아직 가정에서의 자기 위치를 똑바로 알지 못하는 거요? 당신한테는 우선 이런 문제에 대해서, 나라고 하는 틀림없는 지도자가 딸려 있어요. 종교도 있단 말이오. 

<노라> 아아, 종교요.……그것이 무엇인지 저는 모르겠어요. 

<헬머>당신은 어린애 같은 소리를 하는 군. 당신은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를 모르고 있어. 

<노라> 모르고 있어요. 틀림없어요, 그건. 그러므로 이제부터 더 사회를 잘 알아야겠어요. 제가 옳은가, 사회가 옳은 가, 밝혀내야만 해요.. 


위의 대화는 입센의 ‘인형의 집(1897)'의 한 대목이다. 한 가정의 어머니로, ‘정신적으로 자립할 수 없는 미숙한 존재의 여성’으로 작은 새 혹은 인형처럼 취급 받아오던 주인공 노라가, 드디어 가정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아내이며 어머니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살겠다고 선언하는 부분이다. 현재 한국 사회의 여권은 이 연극이 처음 코펜하겐 왕립 극장에서 공연되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신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의식적인 측면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외면적인 측면에 치우치는 경향이 강하다. 더구나 1897년에서부터 지금 2005년까지의 긴 시간을 생각하면, 여권의 신장 속도라는 것은 과장하여 지구의 변동만큼이나 느린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 간단하게 정의 한다면 ‘최선의 삶이라고도 할 수 없고 최악의 삶이라고도 할 수 없는 모호한 경계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외면적으로 여성은 너무나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지니고 있으나, 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 아직도 여자는 ‘인형의 집’에 사는 ‘인형’적 가치밖에 지니지 못했다는 뜻이다. 여성 인력의 사회 진출이 40%에 육박하는 나라 중 하나이면서도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너무나 많은 성별 분리현상을 목격하고 그것을 당연시 여기고 있다. 쉬운 예를 들어, 우리 사회 전반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남자 의사와 여자 간호사에 대해서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반면 여자 의사에 남자 간호사라고 하면 비웃기가 십상이다. 전업주부에 관한 편견 역시 마찬가지이다. ‘전업주부’라 하면 저녁을 지어 남편을 기다리는 우리 어머니들만을 생각할 뿐, 아기 기저귀를 갈고 우유를 먹이며 앞치마를 두르고 설거지를 하는 아버지들의 모습을 떠올리지는 않는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의 악습에 따라 양성을 달리 취급하는 차별적인 태도를 매우 자주 취하고 있다. 각 성이 바람직한 상을 따르지 않거나 성별에 따른 기대 역할에 위배되는 행동을 할 때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곤 한다. 이러한 성별 분리 현상은 사회 현상에서 뿐만이 아니라 언어에서도 나타난다. 누구도 남녀(男女)를 녀남(女男)이라 발음하지 않고 자녀(子女)를 녀자(女子)라고 하지 않으며 부모(父母)를 모부(母父)라고 하지 않지만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생각이 완전히 선진화되었다고 착각할 뿐, 그 누구도 유교적 악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별 분리 현상은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가? 
성별 분리 현상은 흔히 말하는 ‘남녀 차별’ 로서 정확한 용어로는 성차별 현상, 또는 성 차별주의(sexism) 라고도 한다. 이러한 성차별은 남녀 간의 불평등한 제도를 정당화하고 지지하는 이데올로기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지금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성차별 현상, 이것은 크게 세가지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먼저, 법적 및 정치적 차별이다. 우리나라 법은 여권의 신장에 비례하여 많은 변화를 겪어 왔다. 특히 아들과 딸에의 동등상속이나 친족 범위를 아버지 쪽이나 어머니 쪽에 동등하도록 바꾼 점은 가족법에 있어서의 파격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호주제에서 뚜렷이 느낄 수 있다. 호주제는 어린 아들이 할머니보다 우선 호주가 되고, 여성이 결혼을 하면 남편의 호적으로, 남편이 죽으면 아들의 호적으로 입적하는 등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남녀차별의식을 조장하고 제도화하는 것으로 개인의 존엄과 양성평등을 보장하고 있는 헌법 정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성 차별의 마지막 보루 였던 호주제의 폐지론이 거론되면서, 미흡한 면이 없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양성 평등에 한발 다가갔다고 할 수 있겠다. 

다음으론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얼마 전, 어느 대기업에서 여사원을 뽑는 조건 중 ‘키 165cm 이상의 용모 단정한 여자’라는 항목으로 여러 매스컴과 사람들의 구설수에 올라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다. 많이 나아졌다고들 하나, 여성들은 아직도 채용이나 승진 및 임금 책정에 있어서 남성에 비해 상당한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이는 사회 내의 성 계층화와 연결이 되는데 여성은 남성에 비해 경제적, 사회적으로 훨씬 낮은 지위에 있으므로 남성과 여성 사이에 위계질서가 형성되고 여성이 받고 있는 차별적 대우가 제도화되어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남성들은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비록 같은 직종에 종사한다 할지라도 여성의 지위와 임금은 남성에 비하여 낮은 실정이다. 여성들을 직장 내에서 동등한 능력을 지닌 동료로 인정하기보다는 ‘꽃’이라 비유하며 단순히 여성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여성 근로자들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들을 업무 중심으로 평가하지 않는 한, 직장 내에서의 여성에 대한 차별이 없어지는 것은 요원하리라 여겨진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큰 문제는 문화적 차별에 있다. 지금이야 많이 나아졌지만, 남아 선호사상이야 한국 사회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남아 선호를 제외한다면 예전에 여성에게 바라던 ‘현모양처’가 여성의 사회화로 인해 점차 묵인되면서 대체적으로 등장한 ‘수퍼우먼’이다. 여성은 밖에서는 남자와 같이 전문직을 가진 유능한 인간으로, 안에서는 아이를 잘 키우고 집안 일 역시 완벽하게 해 내는 전통적 한국의 어머니상을 요구당한다. 각자의 직장에서 일하고 퇴근하여 집에 돌아오는 부부의 모습은 대조적이다. 남편은 신문을 보거나 TV를 켜고 여자는 옷조차 갈아입지 못한 채 집안일 하기에 바쁘다. ‘요즘 세상에 무슨…’ 라 하지만, 결코 오래 전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성은 ‘슈퍼우먼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다. 상황이 이 정도로 모순적이지 않다 해도, 그 정신만은 아이러니 그 자체이다. 20대 남성을 중심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여자가 맞벌이를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으나 집안일을 분배하겠다는 의견은 30%에 지나지 않았으며, 아이의 양육 문제에 관해 묻자 ‘아이는 엄마에게 커야 한다’라는 의견이 과반수를 차지했다. 남성에게 양육과 집안일은 ‘자신의 일’이라는 생각보다는 ‘여성의 일을 도와준다’ 라는 식의 ‘선처, 혹은 은혜’라는 의식이 지배적이다. 문제는 이것이 무엇이 문제인가를 모르는 데 있다. 

남성의 의식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의식 역시 모순된 것 투성이다. 입으로는 여권 신장을 주창하면서도 힘든 일이 있으면 ‘여자니까’를 내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권리만 주창하고 자신이 당연히 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으니 하는 주장마다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여자도 전기를 고칠 수 있고, 벽에 못을 박을 수 있고 무거운 물건을 들 수 있다. 같이 식사를 하면 돈은 나누어 내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점을 간과한 채 사회만을 비판하다가도 남성만 만나면 ‘힘이 없어서 저런 것은 못해요.’‘원래 조금만 먹어도 배불러요.’‘남자니까 알아서 계산하겠지.’하는 식의 생각은 같은 여자가 봐도 한심하다. 행동은 스스로를 차별하게 하면서도 필요할 때 ‘양성평등’을 찾는 태도는 지극히 수준 미달이다. 남자와 평등한 존재로 대우받고 싶다면 남자와 같이 행동하라. 편안할 때 여권신장을 외치고 힘들 일은 나 몰라라 하는 얌체족은 스스로를 성차별로 빠져들게 만들 뿐 절대 남자와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없다. ‘여자니까’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니까’ 못 하는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우쳐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성 차별이 나타나는 유형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성차별을 일으키는 주 요인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바로 대중매체와 교육이다. 
대중매체는 대량의 대중문화를 생성한다. 그런데 이러한 대중매체가 여성을 단순히 인격적이기보다는 외적인 매력에 비중을 두어 평가를 하고 진정한 인간 본질의 의미를 왜곡하고 있다. 또한 현대 산업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역할과는 반대로 그 내용과 형식은 전통적 성 고정관념에 의해 여성의 능력과 역할을 소극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한 예로 내가 어렸을 적 좋아하던 만화 중에는「개구쟁이 스머프」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 곳에서 주인공인 남자 난쟁이 ‘스머프’들은 목수, 농부, 음악가, 운동가 등의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반면, 여자 난쟁이 ‘스머페트’들은 노동을 적게 하며 꽃을 재배하고 남성의존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한창 미래의 가능성을 안고 꿈을 키워갈 어린 아이들에게,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잘못된 성 역할을 고착화시킴으로서 능력을 적극적으로 개발, 발전할 수 없게 할 뿐만 아니라 남성우월주의를 심어주어 남존여비의식을 지님으로써 성차별을 당연시 여기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러한 대중매체의 성차별 현상은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지금까지도 변한 것이 거의 없다. 2004년도의 모든 국민들의 뇌리에 깊이 박힌 S방송국의 한 드라마는 가난하지만 씩씩한 한 여성이 재벌가의 아들을 만나 일명 ‘신분상승’을 한다는 ‘신데렐라’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여성에게 남성 의존적 성향을 부추길 뿐이라는 수많은 여론의 맹공격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는 50%의 경이로운 기록을 남기며 수많은 유행어들을 산출해 내 아직까지도 그 여파가 남아있으며, 그 곳에 나온 출연진들을 슈퍼스타로 등극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현재, 2005년, 같은 S방송국에서 나온 한 드라마 역시 문제가 있다. 남편이 다니던 직장에서 잘리면서 전업주부였던 아내가 남편이 다니던 회사에 기능직으로 입사하고 남편이 집안일을 하는 ‘전통적 부부 관계’의 역전 현상을 보여주는 드라마로서, 현재 드라마 시청률의 최고를 달리고 있다. 얼핏 들었을 때는 문제가 될 내용이 아니나, 그 곳에서 빈번하게 나오는 대사와 드라마의 뉘앙스에 문제가 있다. 드라마에서는 아줌마들과 곧잘 어울리는 남편에게 ‘남자가 아니라 주부지’라고 말을 하는데, ‘주부’라면 남자가 아니라는 것 자체가 이미 성차별이라 볼 수 있다. 또한 ‘무엇을 해도 집안일을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너는 너희 남편 집안일 시키고 나돌아 다니는 기분이 좋니?’ 라는 식의 대사는 가족에 대한 무보수의 희생과 사랑을 전제로 하는 집안일을 무가치한 일로 간주할 뿐만 아니라, 여성이 직장에 나가는 것은 단순히 ‘나돌아 다니는’ 것으로 불필요하게 여기고 있다. 게다가 전통적 부부 관계의 역전 현상을 보여준다는 것은 좋으나, 그것을 희화화하여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다는 것 역시 문제가 되고 있다. 

광고 역시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광고에서의 그림이나 사진, 구절들은 우리의 잠재의식에 묘하게 영향을 미쳐 여성과 남성의 인간적 본질을 간과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자라나는 어린이에게까지 건전한 의식형성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요리를 하는 광고에서는 단 한명의 남자 배우도 나오지 않는다. 한 가정을 보여주는 광고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장면은 출근하는 남편의 넥타이를 매어 주고 학교에 가는 자식들을 배웅하는 인자한 어머니이다. 이런 광고를 보며 자란 어린이들은, 남자는 요리를 하지 않는 것 혹은 광고에서 나오는 어머니 상이 바람직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이번에는 교육에 대해 살펴보자.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기본적인 지식을 심어주고 문제 해결 능력을 길러주며 나아가 자아 발견과 성찰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런 교과서에서 역시 은연중에 성차별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저학년일수록 많이 나타나는데 대통령, 농부, 어부, 행정관리, 군인, 위인, 학자 등의 직업 등에서 여성의 모습은 찾아보기가 힘들며, 남성의 직업은 주부와 간호원을 제외한 모든 직종에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는 반면 여성의 직업은 극히 제한적이다. 특히 기술자, 행정관리, 학자, 과학자 등은 단 한 명의 여성도 배치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성별 분업적 배치는 어린 학생들에게 은연중에 양성 각각 미래의 직업이나 성취에 대한 영향을 미치고 남녀는 유별하다는 차별적 의식을 심어줄 수 있다. 

이렇듯 한국인의 의식 속에 깊게 자리 잡은 성차별,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첫째, 미비한 법제도에 대한 보완 작업이 필요하다. 
2001년, 여성 노동법 개정안이 확정되어 발표되었다. 전반적으로는 여권 신장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사료되는 항목들이었으나 문제는 있었다. 바로 육아 휴직금이 월 10만원이라는 점이다. 이것에 대해 여성계는 아이의 분유값도 되지 않는다며 ‘노동부가 당초 육아휴직 신청자에 대한 수요를 잘못 예측해 월 25만원선을 검토하다가 육아휴직 신청자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자 급여를 대폭 낮춘 것은 졸속, 탁상행정의 표본’이라며 맹 비판하였다. 여성 근로자들은 육아 휴직을 신청하지 않는 주요 이유로 정부의 지원금액이 적어서, 업무공백으로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어서, 인사 상 불이익 때문이라고 응답하며 육아 휴직에 대한 현행 법 제도가 얼마나 미비한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법 제도에 대한 정부 측의 적극적인 보완이 필요하다. 

둘째, 가족 속에서는 부모가 성평등의 모델이 되어 자녀에게 본을 보여야 한다. 역할 분담, 의복, 장난감, 놀이, 흥미 등에서 성별 구별보다는 개인의 취향을 충족시켜 주며 동등한 기회와 조건을 주어 가능성을 개발시켜 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성격형성에도 어른들의 편견에서 탈피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줘야 한다. 그리고 교육계는 교과서의 등장인물과 위인의 남녀 비율을 조절하고 인물의 전형적 성격보다는 양성적 성격과 행동 특성을 등장인물이나 학생 지도에서 고려해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론 제도의 변혁이 요구된다. 

셋째, 여성의 차별을 줄이고 양성 평등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 남성과 여성의 공동 경험의 장을 마련하여 함께 참여하는 영역을 넓혀 가야 한다. 한국은 양성에 대한 문화적 고정 관념에 의해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살기를 강요당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변화하는 사회에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정하는 데 있어서 양성 모두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여성 뿐만 아니라 남성 역시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과다한 짐과 본인의 적성을 살리는 데 있어 문화적 제재, 즉 역차별을 느끼고 있는 것인데 조화로운 공동세계의 형성을 위해, 우리는 여성에 대한 연구 뿐만 아니라 남성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하여 원만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여기에는 남자는 물론 여성들의 의식 전환도 필요하다. 남성들은 ‘여자도 할 수 있어’가 아니라 ‘여자니까 할 수 있어’라는 식의 생각을 지닐 필요가 있다. 여성들은 특별대우를 주장하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강한 직업의식을 가지고 여성으로 대우받기보다는 하나의 직업인으로서 의무수행과 권리주장을 할 수 있도록 의식구조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성 차별에 대한 정의와 그것이 나타나는 유형, 그리고 해결 방안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하지만 위의 어떤 조항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태도이다. 

‘인형의 집’에서 노라가 한 대사 그대로, ‘자기에 대한 의무’ 라는 것은 나 스스로를 한 사람의 인격체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아끼는 권리인 동시에 그 권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가 해야만 하는 의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나의 의식 속에 여전히 여성은 깨지기 쉬운 ‘인형’이라는 의식이 잠재되어 있는 한, 결코 인형의 집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인형의 집’의 문을 열고 걸어 나올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진정으로 자신을 아끼겠다는 여성들의 인식의 변화에 있다.